남화연, 《마음의 흐름》에 대한 단상 : 에세이, 무빙 이미지, 노스텔지아
권시우
〈사물보다 큰〉 설치 전경
남화연의 개인전 《마음의 흐름》은 분명 최승희라는 ‘과거’의 안무가를 중요한 전제로 삼지만, 그녀에게 쉽사리 종속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전시장의 2층에 설치된 영상 작업 〈사물보다 큰〉(2020)에서 최승희의 존재는 묘연하다. 해당 작업은 남화연과 (일본에 상주하고 있는 작가의 친구인) 히로후미가 주고 받는 서간 왕래를 토대로 전개되는데, 정작 서간의 내용에서 최승희를 언급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잠깐 앞선 문장에서의 “언급”이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자. 즉 최승희와 관련된 ‘이야기’는 작중의 내레이션의 일부일 뿐, 결코 이미지 차원에서 구현되지 않는다. 일종의 파노라마처럼 연결된 4채널의 영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때로는 서로 교차하면서 제시되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어느 바닷가의 풍경이다. (추측컨데, 일련의 클립들은 히로후미의 현재 거주지인 ‘스지’라는 작은 섬에서 촬영된 것 같다.) 영상의 중반부 이후, 남화연은 히로후미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파도의 흐름, 무엇보다 광대한 바다로부터 ‘지금 여기’에 도달한 파도에 잠재된 시간에 대해서 자문한다.
한 인간으로선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과거’와의 간극. 달리 말해 〈사물보다 큰〉에서 최승희는 작가가 현재로 떠밀려온 ‘과거’에 대해 반추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연상된 흐릿한 기억의 단편에 불과하다. 그러한 영상의 개요는 남화연의 작업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는 시간이라는 모티프를 상기했을 때, 별로 새삼스럽지 않다. 심지어 전시의 서문에서 김해주는 “시간은 남화연 작업의 주재료이자 주제이다.”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해서 자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나에게 뒤이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남화연은 시간을 “작업의 주재료이자 주제”로 삼아, 어떤 정서적인 경험을 연출하는가? 이를테면 〈사물보다 큰〉이 유도하는 “정서”는 지극히 ‘문학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이때의 문학이란 매우 통속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서정시를 대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과 유/무관한) 특정한 텍스트에 대해 부연하는 과정에서, 굳이 ‘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해당 글이 독자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화연은 줄곧 ‘문학적인 제스처’를 취하되, 결코 문학이라는 매체를 실험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사물보다 큰〉이라는 영상 작업을 주도하는 내레이션은 마치 서정시를 연상시킨다. 애초에 서간의 형식은 문학의 특정한 장르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러한 효과는 작중에서 극대화된다. 얼핏 내레이션은 단순히 이미지와 병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클립들을 견인하는 것은 전자이고, 결국 이미지는 (내레이션으로 대변되는) 텍스트의 삽화처럼 보인다. 무빙 이미지에서 ‘이미지’가 그저 삽화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물론 무빙 이미지라는 매체는 단순히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장치들을 포함하지만, 해당 작업이 연출하려는 “정서적인 경험”을 좌우하는 권한이 텍스트에게 부여된다면, 은연중에 무빙 이미지의 시각적인 차원은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남화연이라는 작가의 결격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주지하듯 남화연은 비단 영상 작업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함의하는 서사(혹은 서사적인 모티프)를 영상의 외부에서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운용하며, 그러한 전제는 본 전시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물보다 큰〉을 독립적인 작업으로 독해했을 때, 작가가 의도한 ‘서정성’이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의 통속적인) 문학에 귀속된다는 사실은, 결국 무빙 이미지라는 매체를 충분히 숙고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에세이 필름에서 파생된 하나의 경향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에세이 필름은 영상 차원에서 구현할 수 있는 (픽션과 논픽션 같은) 다양한 형식과 장르들을 작업 내에서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단으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작업은 텍스트 차원에서 서술된 (서정시를 기반으로 하는) 에세이지만, 그와 별개로 섣불리 에세이 필름으로 호명할 수는 없다. 물론 (무성 영화에서의 서브 타이틀subtitle에서 비롯한) 영상과 문학 사이의 접점에 대한 역사는 유구하다. 그러나 무빙 이미지는 반드시 ‘문학’이 될 필요가 없으며,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필요성을 느낀다면, 단순히 통속 문학의 정서와 방법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빙 이미지와 동시대를 공유하는 문학에 잠재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수렴해야만 할 것이다.
무빙 이미지 작가들은 언제까지 에세이스트Essayist를 자처해야만 하는가? 물론 〈사물보다 큰〉의 편집 리듬은 (내레이션의 전개를 굳이 위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유려하다. 심지어 영상의 중반부 이후에, 중앙에 배치된 두 개의 채널이 미묘한 시차를 두고 동일한 내레이션을 반복 상연하는 식의 트릭은 ‘과거’로부터 수신된 메시지라는 소재를 거듭 곱씹게 만든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시도만으로 본 작업이 결국 ‘에세이’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무효화할 수 있을까?
한때 현대미술에서 통용됐던 텍스트성과 별개로, 생각보다 국내의 많은 작가/예비 작가들이 자신의 사적 경험을 고스란히 반영한 소위 ‘일기장’ 작업을 재생산하고 있다. 물론 〈사물보다 큰〉의 서사, 즉 두 화자가 주고 받는 서간들이 실제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독해이며, 설사 실제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과거’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극중에서의 서간이 주로 내적 독백의 형식으로 발화되면서, 은연중에 가상의 ‘일기장’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비판의 지점이라기보다, 남화연이 시간과 연루된 특정한 소재를 다루는 고유한 방법론에 가깝다. 즉 통상의 ‘일기장’ 작업과는 달리, 〈사물보다 큰〉에서 사적 경험은 극중에서 언급하는 최승희와 같은 공적인 인물들에 대한 기록 내지는 기억과 얼마간 혼재돼있다. (이는 화자의 역할이 히로후미에서 남화연으로 전환된 이후 점차 명확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남화연은 작업 외적으로 오랫동안 최승희에 대한 아티스틱 리서치를 진행한 결과, 최승희를 역사적인 인물로 대상화하기보다, 최승희와 관련된 일련의 기록을 얼마간 체화하고 있다. “기록 내지는 기억”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본 작업은 ‘나’라는 개인의 관점에서 의도적으로 역사를 희석시킨다. 혹은 기록이라는 (객관적인) 형식을 (주관적인) 기억으로 범주화함으로써, 비로소 지나간 모든 시간들을 포괄하는 ‘과거’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다시 한번, 무빙 이미지 작가들은 언제까지 에세이스트Essayist를 자처해야만 하는가? 무빙 이미지에서 유독 에세이라는 형식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이미지가 (스크립트로 대변되는) 텍스트와 너무도 정합적이거나, 텍스트의 맥락과는 달리 지나치게 무작위하기 때문이다. 〈사물보다 큰〉은 전자에 가까우며, 아마 후자의 사례는 김희천의 〈바벨〉(2015)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아류작들이 아닐까 싶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양자 모두 ‘이미지’ 자체가 연출할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를 섣불리 유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기존의 촬영이나 편집의 관습 등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빙 이미지에서 ‘이미지’가 과연 조형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작가가 할당한) 시간 내에서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의사-시네마를 표방하는 영상 작업들이 전시장 혹은 블랙박스에서 관객을 향해 일방적으로 상연(혹은 구술)되는 상황은 이미 클리셰가 돼버린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보다 큰〉은 여전히 (설사 ‘일기장’ 작업을 지향하지 않더라도) 에세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주지하듯 그러한 사실은 작가에 대한 기소장이 될 수 없다. 남화연이 굳이 에세이스트를 자처하는 이유는 애초에 작가가 표방하는 작업의 방법론이 ‘문학’에 귀속돼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결국 작가에게 영상이라는 매체는 에세이 차원에서의 ‘서정성’을 배가하기 위한 시각적인 표현 도구에 가깝다. 그러한 사실을 얼마만큼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본 작업을 넘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전시 전반에 대한 맥락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를테면 3층에 설치된 최승희와 관련된 기록들을 포함한 일련의 작업을 살펴보자. 최승희라는 인물을 소실점 삼아 구현된 전시장의 전경은 얼핏 〈사물보다 큰〉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희석시킨 방식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즉 3층은 일종의 아카이브 룸Archive Room으로 기능하며, 관객은 그 안을 배회하는 과정에서 최승희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정보는 통상의 아카이브가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굉장히 불확실하다. 앞서 3층을 아카이브 룸으로 호명했지만, 이는 모든 작업이 소위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보다 큰〉에서 확보한 ‘과거’에 대한 발언권을 토대로) 남화연이라는 개인으로부터 파생된 유사 기억들을 전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안무를 모티프로 삼아 새롭게 창작한 퍼포먼스에서 과거의 신문에서 발췌한 스크랩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작가가 지금까지 최승희라는 인물을 나름의 방식으로 체화해온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3층은 다소 두서 없는 ‘기억의 아카이브’나 다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는 한국근대무용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최승희라는 인물을 장구한 역사의 계보 속에서 명시하지 않는다. 동일한 인물을 소재로 삼은 극장 퍼포먼스 〈이태리의 정원〉(2012)을 발단 삼은 최승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도통 의도를 종잡을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본 전시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일련의 시간은 작가와 최승희를 어떤 식으로든 매개한다.
결국 남화연의 관점에서, 3층에서 제시된 ‘아카이브’는 최승희를 포함한 ‘우리’의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하자면, 일련의 (객관적인) 기록을 체화한 작가는 어느 시점부터 최승희와 (주관적인)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이로써 “한 인간으로선 종잡을 수 없는 ‘과거’와의 간극”은 일시적으로 망각된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언사로 들리지만, 내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본 전시에서 남화연은 최승희와 지속적으로 동화하려고 시도할 뿐, 역사 혹은 역사적인 인물을 사유思惟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픽션의 등장인물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는 독자처럼 보인다. 실제로 최승희라는 ‘과거’의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은 대부분 유실되어 불완전하게 남아있을 뿐이며, 이때 발생하는 시간의 공란은 그녀를 섣불리 역사의 계보에 위치시킬 수 없게끔 만든다. 작가는 시청각에서 진행됐던 전시 《임진가와》(2018)에서 유추할 수 있듯, 언제나 (우연찮게 맞닥뜨린) 특정한 소재에 잠재된 “시간의 공란”에 매료됐으며, 그로부터 파생된 파편적인 기록들과 그 사이의 간극들을 추적하는 일을 작업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앞선 과정은 결코 복원의 과정이 아니라, 다만 “시간의 공란”을 현재의 관점에서 수용했을 때, 어떤 새로운 내러티브가 전개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모의실험에 가깝다. (불완전한) 역사는 픽션이다. 혹은 픽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단언했을 때, 역사 혹은 역사적인 인물은 가까스로 ‘지금 여기’에서 현전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은 남화연이 구사하는 에세이의 방법론을 얼마간 정당화시킨다. 본 전시, 특히나 3층의 아카이브 룸은 최승희라는 픽션을 (주관적으로) 편찬한 결과로서, 모든 작업 및 자료들은 결국 남화연 개인의 기억으로 범주화된 채 다소 두서없이 나열된다. 즉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전시 차원에서 일종의 에세이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한 소위 ‘문학적인 뉘앙스’가 아카이브라는 형식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혹은 ‘문학적인 뉘앙스’에 의해 불완전한 역사는 단순히 신뢰할 수 없는 아카이브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경험을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 거듭난다. 즉 ‘과거’와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한 작가의 지속적인 노력은, 역으로 관객에게 ‘과거’가 얼마나 아득한 곳에 위치해있으며, 우리의 현재 또한 언젠가 시간의 흐름에 휩쓸린 채 그곳으로 떠밀려갈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암시한다. (본 전시에서 ‘과거’와 현재는 픽션에 의지해 가까스로 봉합돼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3층에 산개한 “기록 내지는 기억”들은 자신들의 헐거운 관계를 의도적으로 노출하면서, 관객에게 픽션에 대한 믿음을 굳이 강요하지 않는다.)
분명 〈사물보다 큰〉에서 화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줄곧 유지했던 1인칭이라는 전제는 3층에 이르러 ‘우리’라는 복수의 존재, 혹은 두 인물의 기록/기억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다소 분열적인 존재로 환원된다. 달리 말해 본 작업은 에세이의 도입부로서, 독립적인 영상 작업이라기보다 (작업의 외부에서) 작가가 최승희를 어떻게 자신의 일부로 기억하고 있는지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그런 의미에서 남화연을 섣불리 무빙 이미지 작가로 호명하는 것은 곤란하다. 주지하듯 본 작업이 여전히 텍스트에 의해 주도된다고 했을 때, ‘이미지’가 에세이를 위한 “시각적인 표현 도구”로 남용됐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제 작가가 전시 차원에서 구사하는 에세이라는 방법론을 얼마간 납득할 수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 전시에서 〈사물보다 큰〉이 점유하고 있는 포지션은 (그것의 물리적인 스케일과 무관하게) 지나치게 협소하다. 1인칭 화자를 내파하기 위한 작업 혹은 전시 차원의 발단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왜 굳이 영상이어야만 하는가? 혹은 에세이스트가 자신의 의도를 배가하기 위해 굳이 삽화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제기한 질문들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사물보다 큰〉에서 ‘이미지’는 삽화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장식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는 비단 남화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굳이 에세이를 서술하려는 모든 작가/예비 작가들에게 해당된다. 물론 장식적인 이미지는 그 자체로 유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빙 이미지에서 ‘이미지’를 소외시킨 결과에 불과하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다른 한편, 최근 국내의 미술계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문학적인 뉘앙스’는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마음의 흐름》에서 작가가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과거’와의 간극은 일종의 노스텔지아Nostalgia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서술되는 에세이는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거듭 현재를 유예하고 있다. 이때의 현재란 단순히 우리가 속해있는 특정한 시간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성이 와해된 이후, 암묵적으로 동결된 현대미술의 공론장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작업 혹은 전시가 공론에 기여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통속 문학의 정서에 의지한 채 미술을 오로지 감상적으로 소비하거나, 그럴듯한 시적 어휘로 포장하기에 그친다면, 현재에 대한 사유思惟는 무마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와 관련해 세실극장에서 개막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의 연계 심포지엄인 〈큐레이터로서의 큐레이터〉의 한 장면을 상기하게 된다. 국내의 미술계에서 발생했던 소위 거대 담론의 흥망성쇠를 논의한 이영철과 김장언의 발제 이후, 현시원은 마침내 현재를 거론하면서, 최소한 자신은 큐레이터로서 “셜록 홈즈”의 시선으로 우연찮게 맞닥뜨린 사물이나 장소에서의 미시적인 경험을 집요하게 좇고 있다고 상술했다. 1즉 동시대의 폐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미시적인 경험”을 모티프 삼아 일련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의 ‘사건’은 대체로 에세이의 형식으로 귀결되며, 반드시 노스텔지아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현재를 그저 사소한 경험의 파편들로 환원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소한 경험의 파편들”을 공유하면서 형성한 네트워크는 일종의 취미 공동체로서, 동시대의 폐허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활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이를테면 ‘시청각 문서’와 같은 텍스트가 한때 다양한 개인의 정서와 미감 등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면서 일상 차원의 활력을 부여했던 것처럼. 그러나 현재가 그저 개개인의 일상들을 매개로 기록 혹은 서술되는 데 그친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공론은 갈수록 묘연해질 수 밖에 없다. 노스텔지아의 관점에서 현재를 유예하건, “미시적인 경험”을 경유해 현재를 축소하건, 지금까지 국내의 미술계에서 (문학 자체가 아닌) ‘문학적인 뉘앙스’를 지향했던 대부분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 즉 더 이상 공론으로 삼을 만한 의제가 부재한 상황을 계속해서 우회해왔다. 동시대의 폐허는 과연 언제까지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제 “셜록홈즈”처럼 “사소한 일상의 파편들”을 좇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출구를 모색해야 될지도 모른다. 혹은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공론을 재개하거나. 물론 에세이라는 형식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만약 모두가 에세이스트를 자처한다면 현재의 시간은 한 개인의 지엽적인 시야 내에서 공회전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억의 아카이브’를 빠져나왔다.
- 참고로 <큐레이터로서의 큐레이터>에서 현시원이 언급한 “셜록홈즈”는 개인의 취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사 연구에서 통용되는 가추법abduction의 맥락에서 연원한다. 가추법이란 “가설을 세우거나 규칙, 결과를 통해 어떤 상황을 추리하고 논증하는 방식”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관찰된 ‘사소한 것’은 (거시적 관점과는 다른 경로로) “세계의 큰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로 작용한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링크 참고. 권성수, 「사회학자가 셜록홈즈에게 배워야 할 것들」, 리뷰 아카이브, 2016. http://www.bookpot.net/news/articleView.html?idxno=68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