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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동'세대' 미술에 관한 코멘터리

<한시적 열대>에 관한 소고 #70~10

<한시적 열대>에 관한 소고 #70~10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이 글은 지난 530일 케이크갤러리에서 개막한 조혜진 개인전 <한시적 열대>를 기획한 노해나 큐레이터의 청탁으로 쓰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사실 <한시적 열대>에서 제시되는 화초들은 나에게 무가치하다. 식물을 특별히 애호하지 않을뿐더러 화초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풍경은 대체로 과거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현재로부터 물리적으로 탈궤한다는 뜻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세대적 기억과는 도저히 포개질 수 없는 영역에 화초를 비롯한 소위 꽃무늬들은 만개해있다. 그러므로 본 전시에 대한 일종의 전사로써 작용하는 일련의 리서치 자료들을 토대로 그러한 무의식적 반감들을 한번 가늠해보고자 한다.

 

전시의 내러티브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엽식물이라는 계보 아래서 다소 느슨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관엽식물이 각종 지면을 빌어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언급되는 70년대는 강남을 거점으로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중산층들에게 보급화 됐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아파트나 연립주택의 증가로 1년생 화초 또는 실내 화초류들1)이 불티나게 팔렸나갔던 8,90년대의 풍경 역시 일종의 수납형 정원으로써 베란다라는 자투리 공간을 틀었던 당시 중산층 가구 특유의 주거형태를 지시한다.

 

이때의 베란다란 80년대부터 기묘하게 중첩되기 시작한 아파트 세대들에게 아파트 이전의 생활양식, 즉 주거와 별도로 마당이나 정원을 가꿨던 전원적인 관습의 여진으로써 남아있다. 문제는 정작 그 안에 비치되기 위해 취사선택된 묘목들이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에 대응되는 이국의 정취, 혹은 소위 고급진취미 문화를 어설프게 환기하는 소형 관엽식물이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아파트는 근현대적으로 혼종된 과도기적 시공간을 연출해낸다.


<서울과 열대식물> 열대식물과 관련된 기사자료

 

그러나 그로부터 몇 세대를 여과한 이후에야 걸러 나온 는 고작 원룸 공간에서의 자취의 경력이 있을 뿐, 불행하게도 베란다도 마당도 자발적으로 가꿔본 경험이 없다. 생활의 편의성을 강조하는 1인 가구에 굳이 베란다를 포함시키는 것은 과도한 풀패키지거나, 설사 사후적으로 베란다를 확장한들 더 이상 오롯이 수납형 정원이나 마당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한시적 열대>는 그런 의미에서 점차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주거 형태인 1인 가구를 괄호친 상태에서 불현듯 과거의 롤페이퍼를 감는다. 이를테면 처치곤란의 열대식물이 버려지거나, 버려짐으로써 재차 묘목으로 심긴 일련의 장소들을 맵핑하는 식이다(<열대식물 지형도>). 관객은 앞서 언급한 리서치 자료들을 대차대조하며 이제는 폐기된 관엽식물들이 사실은 한국적 문화와 이종되며 관상용인 동시에 의례적 속성을 지닌 의사 상품으로써 유통됐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관엽식물이 관상되든 경조사를 기리기 위해 과시적으로 진열되든, <열대식물 지형도>를 통해 파악된 열대식물들은 실상 모두에게서 버려진 완전하게 무가치한 존재나 다름없다. 애초에 나를 포함한 청년 세대들은 더 이상 화초로 상징되는, 즉 정주하며 가꿔낼 수 있는 주거 공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2) 더불어 한때 공간 소유를 성취하는 듯 보였던 구세대들은 부동산 자산으로 불어난 공간에 의해 하우스푸어라는 형태로 외려 압사당하고 있다. 이처럼 화초는 혼종된 시공간이라는 주술에서 풀려나자마자 완벽하게 자신의 상징적 토대를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엽식물들은 여전히 얼마간 잔재하고 있고 조혜진이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천착하려는 지점도 바로 그 부근이다. 중산층 이하의 가정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체로 6,70년대 태생 자녀들과 동거하거나 얼마간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분가한 일부의 노년 세대들이 은연중에 자신의 전원적인 생활 방식을 드러내며 화초들을 가꾸고는 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협소하게나마 연장된과거를 공간들의 틈에서 경작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들의 다소 환시적인 정원 이후에 화초들을 맡아줄 거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관엽식물들이 실용적인 인테리어로써 작용하는 장소는 기껏 복덕방뿐이다. 복덕방의 화초들은 여전히 혼종된 시공간을 기억하거나 유년의 어렴풋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세대들에게 공간에 대한 은밀한 단서로써 어필하며 부동산 매매 환경의 일부로써 구실한다. 그러나 화초를 비롯한 관엽식물들은 점차 향수병조차 자극하지 못하는, 더 이상 실질적으로 감각될 수조차 없는 과거의 토대로부터 피어난 의미 그대로의 꽃무늬로 작용할 뿐이다. 그것은 촌스러운 동시에 위압스런 표정으로 청년들을, 혹은 공간과 함께 폭락한 현재의 임시적거주자들을 겨누고 있다.

 

화초를 비롯한 관엽식물들은 이런 식으로 한국의 근현대를 에둘러 순회한 끝에 결국에는 재차 폐기되어야 마땅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어지는 조혜진의 작업들은 이렇듯 더 이상 아무도 기꺼워하지 않는 공간적 토대의 상징물들에 대한 내쫓긴 자의 어슷한 반사작용처럼 보인다. 서울 각지에 버려진 열대나무를 수집해 각목의 형태로 가공하거나(<이용 가능한 나무>), 각종 폐품들을 조립해 열대식물의 형태를 주조해냄으로써(열대 매뉴얼 시리즈) 작가는 그것들을 얼핏 사용가능한 자재들로 재가공하는 듯 뵈지만 결국 그것들에 최소한의 조형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성급히 작업으로써, 혹은 좌절된 기념비로써 방부처리한다. 이렇듯 양식적으로 급조된경조화환들 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려야할까.



<이용 가능한 나무> 설치 장면

 

한국은 특히나 유교적 예문화에 근거한 각종 의례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각종 경조사를 통해 지인들을 비정기적으로 헤쳐 모으곤 한다. 이는 품앗이하듯 서로를 기리는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지인들이란 매우 불균질한 대상들이다. 경조사에 직간접적으로 초대받았을 때 참석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경조사의 주최자에게 어떤 식으로 카운트될 것인가와 일맥상통한다. 즉 모종의 친밀함은 사후적으로 구성되거나 검토되는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지인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 더불어 과시적 지인으로써 진열되는 일. 경조화환으로 사용되는 도시루는 그에 기여하는 가장 그럴싸한 방식으로 플라스틱 열대식물의 잎사귀를 만인에게 돌출시킨다.


<한시적 열대>는 그러한 도시루들의 무더기다. 관객은 잠정적으로 제공된 상가건물의 한 귀퉁이(케이크갤러리)에서 열린 전시라는 또 다른 형태의 의례 속에서 무가치한 잎사귀들을 지표삼아 공회전한다. 우리는 이 와중에 서로에게 얼마만큼 지인들일 수 있을까. 더 이상 그런 식의 구습에 의거한 허술한 단위는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작가의 결론인 듯하다. 조혜진은 그저 작업의 몸체를 지닌 경조화환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인이라 호명하고 자축할 뿐이다. 혹은 결국 과거형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잔재들을 굳이 유희해내며 자축의 도구로 삼는다. 그러한 결론은 다소 자폐적이되, 새삼 전시에 헤쳐 모였던 우리의 좌표를 재확인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주거를 포함한 모든 공간들을 의례적으로 감각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분열적인 상태를.


1) 1990.4.4. 경향신문 14.

2) 커먼센터 <혼자 사는 법(A Loner's Guide)>, 혹은 주거의 몰락>,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집단오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