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을 절개하는 법, <실키 네이비 스킨>;<곰염섬>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평면의 앞뒷면을 재고해보자. ‘그것’이 단순히 낱장일리는 없다. 앞에는 말 그대로 평면 위에 투사된 이미지가 있다. 이때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표상하고 있는가? 이를테면 누군가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앞면을 목격하고는 모더니즘적인 숭고를 정초해 제 마음 속에 옮겨 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타임라인은 추상적인 요소들의 정교한 배치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는 숭고미를 갖추기엔 지나치게 허약하거나, 애초에 기하학적으로 재조합할 수 없는 텅 빈 객체들만을 수렴하고 있는 것 같다.
데이터 차원에서의 자기 분열은 이미지를 다수의 이미지들로 증식시키고 그럴수록 단일한 평면을 향한 시선의 초점은 흐려지고 있다. 숭고미는 연출할 수 있지만 도통 실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의 뒷면은? 숭고미와 더불어 이미지가(혹은 이미지들이) 평면상에 정주할 수 없다면, 평면을 뒤에서 지지하는 플랫폼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난 5월 14일 인사미술공간에서 폐막한 <실키 네이비 스킨>과 뒤이은 6월 1일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정지현 개인전 <곰염섬>은 마치 앞선 질문의 양면처럼 묘하게 포개져있다.
1) 앞
<실키 네이비 스킨>에 참여한 박보마, 신현정, 최고은이 상정하고 있는 평면상의 이미지란 손쉽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다. 본 전시에 제시된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분별할 수 없게끔 유독 잔해들로써 널브러져 있거나 서로 얽혀있다. 간혹 출몰하는 속옷이나 마스크팩, 기타 여성용품들은 앞선 전제를 환기하는 단서들인 것 같지만 그러한 오브제들만을 끼워 맞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할 수는 없다. 다만 오브제들은 전시 자체를 텍스트로 간추렸을 때 여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특정한 명사처럼 곳곳에 삽입되어있다. 그러한 명사들 사이의 간극에서 일련의 작업들은 미완성의 문장을 재차 물리적으로 도해해놓은 결과처럼 보인다.
잔해들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실키 네이비 스킨>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총 15개의 팀으로 선별한 신생공간들을 한데 모아 2015년의 타임라인을 기록/재연하고자 했던 <서울 바벨>의 장면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잔해들을 목격하게 된다. 뒤이은 질문은 과연 타임라인은 물리적으로 실존했거나 온전히 재연할 수 있는 대상인가, 라는 것이다. 이를 <실키 네이비 스킨>이라는 텍스트에 걸맞게 고쳐 쓰면, 참여 작가들이 상정한 여성은 반드시 구체적인 정체성 혹은 이를 반영한 이미지로 환원해야만 하는 것인가? 박보마, 신현정, 최고은에게 있어서 잔해로써의 작업이란 단순히 여성을 미완의 상태로 남겨두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외려 그들은 본 전시에서 굳이 익명을 자처한 채 ‘여성’이라는 (텅 빈) 명사의 위치를 점유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각자의 작업들을 조건반사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서로를 연대자라 칭했다. 뭐, 전혀 불가해한 주장은 아니다.”1)
이로써 관객은 명사를 암시하는 오브제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실상 여성성이 구체적으로 코드화되어있지 않은 익명의 잔해들에 사후적으로 여성성을 투사하거나 견주며 각자의 문장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합해나간다. <실키 네이비 스킨>에서 여성을 언어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앞선 맥락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낱말 맞추기 게임에서, 여성 명사의 전후에 조합할 수 있는 문장들이 전시가 진행되는 와중에 관객에 의해 거듭 변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맥거핀인 동시에 바로 그 형식을 빌어 여성성을 단일한 평면상에 붙들지 않고 전시 전반의 암묵적인 룰로 작용하며 잔해들을 조형해나가는 동시에 별다른 미련 없이 헤친다.
<실키 네이비 스킨SILKY NAVY SKIN> B1
2) 뒤
명사를 ‘여성’ 대신 공란으로 남겨두는 순간, 앞선 형용사와 동사와 부사들은 문장이라는 최소한의 골격과 대응되는 평면을 수식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때의 평면은 ‘연대체’로써 열거된 각각의 작업 매체들에 의해 어렴풋이 암시될 뿐 별다른 출처와 의미가 부재한다. 이를테면 신현정이 가변적인 색을 다양한 배율의 캔버스에 스프레이로 분사한 회화 오브제와 빛을 판촉의 대상으로 재구성한 뒤 프린트한 박보마의 이미지는 각자의 지시대상으로부터 벗어나 ‘불가해한’ 평면에 부속된 미완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분사된 색과 프린트의 낱장은 의미론적으로 얽히는 와중에 무의미한 평면, 이를테면 스킨skin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고은이 절삭한 냉장고나 책장과 같은 일상의 가전제품들은 앞선 평면의 요소들을 미처 단일하게 통합하지 못하고 현실상에 뱉어낸 뒤 망가진 듯한 물리적인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이들의 평면은 부득이하게 무한히 확장된다. 문장이라는 관성 혹은 관계에 의해 잔해들은 특정한 의미를 지향하는 연대체로써 구실하지만, 실상 명사는 의미를 추론하기 위한 동력으로 작용할 뿐 의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실키 네이비 스킨>의 연대체에서는 연대라는 상태만이 존재하며, 더불어 일련의 작업들은 각자가 담보한 고유의 평면성을 포기하되 평면이라는 상태만을 유지한다. 이로써 현상학적인 평면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박보마와 신현정의 스킨화된 이미지는 앞선 관계를 방증하려 애쓰는 무의미의 표지이고 최고은의 오브제는 표지라는 골격 자체다. 이러한 방향성들이 본 전시에서 의미 너머의 평면 자체를 망상하게끔 유도한다. 여성이라는 명사는 여전히 이러한 망상을 지피는 명시적인 동력이지만, 그와 동시에 의미론적으로 평면성을 제약하며 꼬리를 무는 루프loop를 연출한다. 이것이 바로 <실키 네이비 스킨>이 제시하는 평면의 뒷면, 혹은 그 안에서 오작동하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반면 <곰염섬>의 뒷면은 한층 더 하드웨어적인 속성을 부각한다. 정지현은 본 전시에서 프레임의 배율을 말 그대로 공간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전시장은 언뜻 철거 중인 무대처럼 보인다. 면면을 살펴보면 실제 벽의 구조물을 뜯어낸 잔해들과 철제 빔이나 각목, 철사 따위로 짠 격자의 형태들이 공간의 내부를 미묘하게 구획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조성된 어슷한 지형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상정했을 때, 조명의 채도에 따라 전시장은 분명 암묵적으로 프레임의 앞/뒤를 분별하고 있다. 특히나 전시장의 명시적인 ‘뒷면’이거나 휴지인 듯 별도로 마련된 틈새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한 점의 회화(황량한 벌판에서 탁구를 치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이 담긴)와 주변의 오브제들(‘바깥’의 잔해들 일부가 다소 정갈하게 비치된)은 은은한 채도 속에서 일순 경건해진다. 그러나 이곳을 돌아 나오면 다시 상황은 반전된다.
밝은 해상도의 앞면에 설치된 작업들의 복잡한 조합은 어두운 뒷면에 다다르며 완화되지만, 그러한 형태상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들은 모두 철거된 격자 속으로 수렴되는 오작동의 기계들이다. 마치 격자로부터 연장된 듯한 각종 전선과 회로들은 소형 전구를 밝히거나 얇은 금속판을 건드리는 등의 무의미한 장치들을 곳곳에 삽입한다. 특정 구간의 천장에서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종이의 낱장들이 떨어지며 바닥을 어지럽힌다. 구조물 사이에 비치된 작은 규격의 모니터에서는 노이즈가 뒤섞인 탁구 경기 장면을 상연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로부터 비롯된 미세한 움직임과 소음은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개개의 요소들로 분별할 수 없지만, 전시장 전반에 뒤섞이며 이미 철거된 공간 혹은 프레임에 얄팍한 시간성을 부여한다.
정지현 <곰염섬> 전시 전경
3) 옆
<곰염섬>은 종료 이후에도 아직 여진이 남은 채 윙윙 거리는 본체처럼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무엇이 종료됐는가? 무한히 연장된 탁구의 랠리처럼 일련의 장치들은 반복적인 동작을 구사할 뿐 정작 게임의 룰 자체에 대해선 함구한다. 온통 여진만이 있는 공간. 앞/뒤라는 구분은 프레임 자체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이 부재하거나,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없을 때 서로 등가의 위치를 공유하며 무의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에서는 여전히 앞/뒤의 골격이 지형과 지물의 형태로 잔존한다. 이는 마치 앞선 <실키 네이비 스킨>에서 상연한 최고은의 망가진 플랫폼이 보다 비대해지고 구체화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지현의 <곰염섬>은 불가해한 평면을 애써 묘사하기 위한 오작동의 게임이라기보다, 평면의 빈자리를 한때 그것을 지지했던 플랫폼의 변주된 형태들로 메우려는 시도에 가깝다.
일상에서 빌려온 사물들은 격자, 즉 프레임을 구성하지만 그 위에 어떠한 이미지도 투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앙상한 내부를 노출하고 만다. 그와 동시에 앙상한 내부는 개개의 사물들로 조립됐기 때문에 그 자체로 레디메이드 형상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스스로 자기완결적인 조형 이미지로써 기능하고자 하는 프레임-기계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지현은 이 모두가 오작동의 과정일 뿐임을 인정하듯 굳이 틈새의 공간을 절개하고 그 안에 회화 작업을 안치한다. 레디메이드 형상은 반복적으로 프레임의 일부로 회귀할 뿐 이미지를 온전히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불시착한 추상이란 결국 단일한 차원의 평면을 포기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미지는 추상적으로 도해되지만 결코 일시에 포착해낼 수는 없다. 포착한 결과값을 잃은 프레임은 기계로써 오작동하며 어떻게든 ‘장면’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연출하고 있다.
아무런 효용이 없는 기계의 메커니즘은 해묵은 소음을 되풀이하며 단지 평면의 부재를 재생산한다. <곰염섬>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는 노스탤지아의 정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소형 전구의 미미한 불빛과 같은 장치들은 내심 평면의 부재를 애도하거나, 이제 더 이상 온전히 성립할 수 없는 평면성을 산업적인 키트kit를 빌어서라도 회생시키고 싶은 얄팍한 의지, 혹은 오래 전에 ‘과거’로 묶인 시간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어떻게든 작동하며 (사실은 이미지 조형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프레임-기계를 부연하고 있다.
4) 덽
일련의 작업들이 평면을 포기함으로써 파생된 잔해는 갈수록 물리적 공간의 면면과 접속한 채, 실재하지 않는 ‘추상성’을 현상학적인 경험의 회로들로 조형해나가고 있다. 이때 암시되는 불가해한 평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연대체로써의 이미지와 프레임-기계 사이에 접힌 채 삽입된 그것은 확실히 ‘이전’의 평면과는 다른 차원에 놓이며, 따라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소비할 수도 없다.
점차 물리적 공간을 구획해나가는 평면은 새삼 현실과 가상 간의 인프라신(infrathin)한 관계를 재고하게끔 한다. 주지하듯 <실키 네이비 스킨>과 <곰염섬>은 구체화된 대상으로써의 평면이 부재한다는 전제 하에 그 ‘이후’의 평면을 암시한다. 그것은 실체가 없되 현실에 대한 관성으로써 작용하며 실재계의 이미지를 뒤섞는다. 문제는 이미지가 뒤섞일 뿐인데, 공간의 지형과 지물들 혹은 그에 대한 감각의 질서가 이미지와 연동된 채 재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회화적 평면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리얼리즘의 주제는, 외려 현실이 평면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리얼리티로 재차 역전된다. 결국 앞선 사례들이 수렴하는 평면이란 이미지와 공간의 요소가 뒤엉킨 특정한 모듈들의 배열을 통해 양자의 인프라신한 차이를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 발생하는 착시라고 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을 굳이 목격하고자 한다.
과연 인프라신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 최소한 오작동의 루프는 그것을 단일한 이미지가 아닌 공간 내부의 궤적으로 구현하는데 그친다. 이때 공간은 그 자체로 유사 프레임으로 작용하며 마치 인덱스 페이지 상에 나열된 다중적인 이미지들처럼 잔해들의 상호관계를 빌어 ‘평면'에 대한 미묘한 투시도법을 형성한다. 우리는 평면을 절개함으로써, 선뜻 그 속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마침내 출구로 나왔을 때 여전히 초점이 흐린 채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1) <실키 네이비 스킨SILKY NAVY SKIN> 전시 서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