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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GRAY: 더 그레이쉬 미러 비트윈 블랙 앤드 화이트>

<GRAY: 더 그레이쉬 미러 비트윈 블랙 앤드 화이트>


박정우



M.칼리니스쿠는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Five Faces of Modernity(1987)에서, 오스카 와일드의거짓의 시대Decay of Lying(1889)’를 인용하며 모더니티와 키치의 관계를 비평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때 자연이 예술을 모방했고, 마치 어떤 일몰은 코로Corot의 그림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오늘날 자연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워지고자 대량생산된 복제화를 모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이다. 풍경을 감상하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실재와 재현의 매개 관계를 뒤집은 이 역설법은 디지털이 시각적 경험에 관한 모든 프로세스를 하이퍼리얼하게 재매개한 현재의 시점에 적용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발생시킨다. 디지털이미지는 이미지로 하여금 무엇을 모방하게 만드는가?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을 기반으로 회화, 설치, 영상작업 등을 병행하고 있는 미술가이다. 그가 드로잉의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인그림판 MS PAINT Microsoft corporation의 대표적인 OS Windows 시리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저용량의 래스터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이며, 1995년 출시된 Windows 95부터 2009년에 출시된 Windows 7 이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일관된 인터페이스를 유지했을 정도로 매우 원초적인 기능만 제공하였다. 2D 이미지 제작을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Adobe Systems Photoshop, Illustrator등과 비교하면 대부분의 디테일한 설정이 불가능하고, 해상도가 낮으며, 타블렛을 사용하더라도 필압이 감지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점은 레이어 구조로 이미지를 편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임의의 형태를 직접 드로잉 하거나, 혹은 프로그래밍된 도형 템플릿을 화면 위에 올려두더라도, 일단 다른 종류의 형태와 겹쳐지고 나면 앞과 뒤를 분리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형적 단위들 사이에 시공간적 질서가 부재하는 셈이다. 당연히 과정의 일부를 별도로 수정하거나 재구조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지나간 과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회화의 물리적 제약과 직관적으로 유사하지만, 결과는 이질적이다.

 

작가는그림판을 통해 아날로그 드로잉의 섬세함을 가장하기보다는 인터페이스가 강제하는 제약에 따라 다소 조악하거나 둔탁할 수 밖에 없는 조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만나거나 엇갈리는 외곽선들의 관계, 화면에서 색면들이 차지하는 시각적 무게감 등을 긴장감 있게 조율하여 조형적 질서를 구성한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색감이나 윤곽의 형태에서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그림판스러움, ‘페인팅을 디지털로 재매개하는 초기 과정의 기술적 한계가 번들 소프트웨어라는 이유로 꾸준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하이퍼매개적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에 기반한 조형감각에 인터페이스-특정성을 부여하고, 이를 회화, 영상, 꼴라쥬 등 각 형식의 지지체가 일종의 모듈이나 템플릿으로 여겨지는 상황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매체특정성을 전유한다.

 

그렇다면 정작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어떠한가? 첫 개인전 제목인 <Built-in>은 회화에 대한 인식을 인테리어의 개념으로 약호화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작가는 황재민 비평가와의 인터뷰에서빌트인옆면의 문제를 다루는 단어라 생각했다고 함축적으로 답변하는데, 이는 벽면의 일부가 된 사물들의 평면적 상태와, 벽면으로부터 돌출된 캔버스 두께의 인식론에 대한 미술사적 함의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 마찬가지로가변형 벽체라는 제목 역시 벽 표면의 가변성과 벽 자체의 가동성을 동시에 상기시키면서, 입체이면서 평면이고, 물질이면서 이미지인, 회화의 양가성을 진동하게 만든다. 또한 인테리어의 맥락 안에서 회화가 갖게 될 위상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Built-in>이라는 제목은 회화의 처지를 약간은 자조적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그리는가, 무엇을 그리는가, 어떻게 인식하는가, 어떻게 제시하는가, 이 각각의 단계와 맞물려 있는 일련의 조형적 알고리즘은, 언뜻 보기에 투명해 보일 정도로 명확한 재귀적 구조를 형성하는 탓에,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 외부의 질서가 작품 내부의 질서에 종속되어 보이는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장다해의 작업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에 놓여진 거울의 회전운동 같은 것으로서, 깨끗하고 단단하지만, 결코 투명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