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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역사를 관통하는 '눈'

역사를 관통하는 ''

 

이양헌

 

*아트인컬쳐 2018 8월 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위대한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만든 가장 특수한 개념체로서, 그것은 원래 시작과 끝이 정해진 닫힌 텍스트였으며 그 결말에는 언제나이 설정한 궁극의 구원이 쓰여 있다고 전해진다. 이 예정된 섭리는 계몽주의와 실증주의 사관이 등장한 이후에도 소거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낙관적인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투영되어 세속화된 채 구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보를 향한 이 목적론적 매개-고리가 끊어진 건 아마도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구축되었던 사회주의 체제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완전히 무너진 이후일 것이다. 역사가 이미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리고 대사건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믿음 사이에서 바야흐로역사의 종말이 선언되었다.

 

역사와의 절연 혹은역사-없음으로 지루하게 정체된 오늘날, 육근병은 상당히 오랫동안 역사의 형상들을 추적해왔다. 무덤과 심장박동, 탯줄을 닮은 통로, 아이의 울음소리와 같은 모티프들은 그 자체로 동양적인 자연관이나 종교적인 제유로 치환될 어떤 추상적인 당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은 어떠한가? 초역사적인 주체의 자리,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역사의 증인이자 세계를 담지한 극소체로서 거대한 봉분 위의 시선은 복잡한 인과율과 사건의 집합 너머에 어쩌면 부동의 도표가 존재하리라는, 나아가 그것을 읽어낸다면 시대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원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주의가 파산한 이후 계승할 수 있는 과거와 새로운 미래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서술은 신비주의를 넘어 차라리 반시대적으로 느껴진다.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이미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열두 개의 비디오가 원형으로 배치된 <십이지신상>에서 전면으로 교차하는 스크린들 사이로 역사적 형상들이 출현하고 때때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사를 이루는 기념비적인 인물들이며 동시에 지난 세기 가장 강렬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회억의 계기들이라 할 만하다. 붉은 혁명가와 위대한 선지자들, 비극으로 각인된 존재들이 유령처럼 출몰할 때, 순차적이었던 사건의 배열은 공시적인 풍경으로 전환되고 다()시간의 착란 속에서 이곳은 과거를 잊은 자들을 위한 소극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유령-이미지 뒤에서 다시 등장하는과 잠시 잊고 있던 아이의 심장박동이 들려오는 순간, 이 기념비들은 파편화된 기억으로 과거를 호출하는 목가(牧歌)가 아니라 현재주의와 경합하며 보편사를 세우려는 송가(頌歌)였음이 분명해진다. 또 다른 작품인 <생존은 역사다시간 속의 시간 –>에서 인류사의 어두운 기억들을 간직한 사진은 어째서 역사적 아카이브가 전쟁과 폭력, 재난과 같은 트라우마와 자주 연결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병치된을 통해 그것이 망각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였음을 상기시킨다.

 

역사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이질적인 서사를 누락하고 몫 없는 자들을 배제해왔는지 잊지 않았다면, 대문자 히스토리를 복권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탈역사적 냉소주의는 우리를 붕괴된 시공과 세계 없는 세계들, 기한이 만료된 전거들이 흩어진 폐허의 잔해 위에 도착하게 할 것이다. 육근병이 만든 오래된 형상 중 하나인 <풍경의 소리 + 터를 위한 눈>에서 산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무덤 위로 무구한 아이의 눈이 재생되고 있다.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종결이 유예된 다공성의 역사, 종합을 부정하고 순간으로 파열되는 불연속의 역사 그럼에도 미시사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의 범주를 다시 요청하는 역사는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