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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박혜정

반성착취 운동가, 자유기고가


https://twitter.com/hapjungjigu/status/1009013568950362113?s=19 


얼마 전 메루메루라는 트위터 이용자의 자살로 트위터가 떠들썩했다. 메루메루는 21살의 여성으로, 생전에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본인 블로그에 올렸었고 트위터 상에서 자살해서 트위터계의 아이돌이 되고싶다라는 말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올해 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퀴어방송이라는 팟캐스트에서는 4월에 제 96화에서 메루 추모 특집을 방송했고 작가 한솔은 최근 <미러의 미러의 미러>(이진실 기획, 합정지구)라는 전시에서 <메루메루빔>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작품을 전시했다. 나는 반성착취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처음 듣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사건을 둘러싼 현실 및 담론 지형과, 이 사건을 다룬 전시에 대한 활동가로서의 생각을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10여년 간 반성매매단체에서 일하며 집결지, 룸살롱, 안마, 다방, 휴게텔, 오피, 조건만남 등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성산업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왔다. 그 과정에서 약물과다복용 또는 자살, 질병 및 건강 악화로 인한 죽음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여성들에게 법률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성착취 남성과 포주들도 많이 만났다. 내가 현장에서 목격한 성산업은 섹스를 사고 파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여자의 몸을 능욕할 권리를 5만원, 10만원 주고 사는 행위는 정당한 거래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성착취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해당 여성이 동의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사회는 돈이 없는 여자는 몸을 파는 게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남에게 심어준다. 자원이 없거나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황의 여자를 팔 벌려 환영하는 성산업과 남자들의 수요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해당 여성이 그 행위에 얼만큼 동의했는지를 먼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산업을 만들어내는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 성착취 남성과 알선자를 처벌하고 성을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 노르딕 모델(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이 채택)을 도입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사이 일부 여성계와 소수자 운동, 좌파 운동 쪽에서 상업화된 성착취를 성노동이라 칭하며 성산업의 완전 비범죄화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성노동또는 성노동자라는 용어를 쓰는 일반인들이 모두 이런 성노동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성노동자라는 단어가 성매매 여성등의 단어보다 더 당사자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언어를 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성착취를 성노동이라고 부를 때, 성착취할 권리를 돈을 주고 산 사람을 고객또는 서비스 이용자, 남의 몸을 팔아서 수익을 취한 포주를 사업가또는 운영자로 정당화해주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산업 속에 있는 여성들을 피해자화하지 않기 위해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활동가들이 있는데, 성산업 속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을 피해자로 보지 않겠다는 것은 곧 가해자와 가해 세력이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으며, 엄연한 피해가 발생하는 착취 현장에 눈감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착취 현장에 눈감는 것을 넘어서,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주체적인 행위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한 예로, 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이 심리적 해리현상을 경험한다. ‘해리는 반복적으로 폭력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들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몸의 감각에서 의식을 분리시키는 대응기제로, 성착취 피해여성들은 흔히 내 몸은 거기 있었지만 내 마음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라거나 정신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착취 피해자에게서 모두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해리는 당장의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현실인식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내 몸이 죽어있는 느낌까지 들게 되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을 칼로 긋는 등의 자해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성노동론자들은 이런 의식 분리 현상을 장려하며, 이것이 성노동자로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주의 성노동자단체인 RhED는 성착취 피해 여성들에게 배포하는 성폭력 예방 매뉴얼에서 통제를 가지는 것이 여러분이 잘 하는 일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일입니다. 가면을 쓰고, 앞에 스크린을 세우고, 여러분이 되고 싶은 사람인 척 하세요.”라고 권고한다. 여성학자 문은미는 소외나 거리두기, 가장하기 등을 성노동이 여성에게 착취적인 노동의 한 증거로 볼 것이 아니라 이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고1)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의 사미숙은 성노동자가 오르가즘을 피하거나 또는 거짓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것은 고객과의 거리두기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성노동자에게 있어 자기 상실이나 섹슈얼리티의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


나는 2016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주최한 성노동관련 세미나에 갔다가 엄청나게 분노한 적이 있다. 여성학자,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성노동은 무대예술과 같은 예술노동이자 쾌락생산노동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성노동이 무기를 파는 노동보다 나쁘지 않다는 말을 20대의 여남 청중 앞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세미나에 오는 젊은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자에게 차별적인 취업 시장과 여성의 외모를 능력의 하나로 보는 풍토, 성희롱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직장 문화 등 여자에게 적대적인 노동 시장이다. 이런 현실을 마주한 이들을 세계 최고의 거대 성산업이 둘러싸고는 잠깐만 괴로움을 참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어서 오라 하는데, 여성학자나 퀴어 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노동을 주장하며 성착취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상업화된 성착취 현장을 오래 보아온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과거에 우리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모아놓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 역군이라고 치켜세우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력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이야기는 달콤한 마약과 같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많은 여성들이 이런 데(성착취 업소)가 없으면 일반 여자들이 강간을 더 많이 당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이 겪는 현실을 정당화해야만 덜 비참하고, 그 곳에서 계속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루메루님이 본인의 블로그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제목은 나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이지만 그 내용은 실상 성착취 현장의 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4살 때 가출했다가 조건만남으로 처음 성착취 피해를 통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당장 먹을 것과 잘 곳이 궁한 14살 청소년에게 돈을 주고 성착취하는 것은 강간이다. 그는 강간 피해자였고 그 첫 성착취 피해경험 후에도 조건만남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강간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충동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수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처럼. ‘메루님 추모특집이라며 방송한 팟캐스트 퀴어방송을 들어 보았다. 고인에 대해 모욕적인 표현들이 사용된 것도 문제적이었지만 이 방송의 진행자는 메루가 청소년기부터 성노동을 했다라고 말하는 데서 어이가 없었다. 성착취를, 강간을 성노동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들은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최근 들어서 성소수자 운동 진영의 활동가들이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고 어떤 여성학자들은 성판매 여성은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성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 나는 레즈비언으로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일부 퀴어 활동가들이 소수자 정체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 ‘퀴어방송의 진행자도 스스로 성노동을 한다고 방송에서 말하는데, 이런 내용을 퀴어한 것으로 가볍게 다루며 방송하는 것이 이런 방송을 듣는 주 청취자인 10, 20대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듯하다.


<메루메루빔>은 노래방 영상 같은 느낌으로 메루메루님의 생전 트윗과 블로그 글 일부를 작가가 촬영한 영상에 노래 가사처럼 입힌 것이었다. “성노동자라서 행복하다”, “난 자랑할 거야 난 섹스로 돈 잘 벌어등의 말들이었다. 노래방 영상 스타일은 고인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기에, 고인을 기리기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다. 게다가 그 고인이 14살 때부터 당한 일들로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고 결국 21살의 나이에 자살을 하게 된 사람일 때, 이런 작품은 고인이 겪어온 고통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작가는 작품에 달린 캡션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기적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의 이기심과 맞먹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기심을 발휘해 그녀를 슬픔의 대상으로 삼아보려 한다. 메루메루의 명복을 빔.”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착취 피해자의 자살이 어떻게 이기적인 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술의 범주 아래 고인의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성노동론이 여자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이를 왜곡해야만 성립 가능한 이론이자 이데올로기이듯, ‘성노동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메루메루님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 또한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을 무화하고 희화시키며 우리에게 거리두기를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예술인가? 난 잘 모르겠다.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볍게 다뤄지며 희화되는 한 예로 보일 뿐이다.


1) 문은미, 성노동은 어떤 노동인가? 친밀한 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성이론, 2009. 12.

2) 사미숙, 쾌락생산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연속간담회 5, 2016. 5.

3) 원미혜, 성판매 여성의 인권탐색을 위한 시론, 비판사회정책, 20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