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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오찬 비평 워크샵

0⥃0, 혹은 투명한 몸과 뒤집힌 세계


00, 혹은 투명한 몸과 뒤집힌 세계


함윤이

 


범퍼! Bump!》 설치 전경


몸들은 부딪칠 때 가장 재미있다. 부딪치는 일은 천천히 사라지는 것, 또한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각주:1]

범퍼! Bump!(이하 범퍼)의 영상들은 서로 만나고 충돌하며 자신의 경로를 찾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전표처럼 놓인 한 쌍의 영상 작품들이 총 다섯 줄, 한가운데로 틈새를 만들면서 천장에 걸려 있다. (가장 마지막의 <Murika><Julie>만은 예외적으로 서로에게 보다 가까이 접해 있다.) 입구를 등지고 서면 오른쪽 행이 이소정의 작품들, 왼쪽은 박세영의 작품들이다. 나란히 걸린 한 쌍의 영상들은 서로 간의 느슨한 연계 속에서 함께 설치되었다.

위캔드의 전시 공간은 한 덩어리로, 분리된 영역 없이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열을 제외하면, 관객들은 영상을 관람하기 위하여 각 작업에 할당된 의자와 헤드셋을 사용한다. 해당 영상의 소리에 집중할 때 영상들 사이의 마찰력은 한층 약화된다. 앞뒤로 반사되는 다른 이미지들, 프로젝터의 빛 등이 미약한 방해가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범퍼의 직접적인 갈등은 물리적인 조건들 아래서보다, 관객들이 전시를 하나의 맥락으로 기억하는 순간 본격적으로 심화한다. 모든 이미지들은 정해진 공간에-묘사하자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각자 다른 스타일의 영상이 양옆으로 밀착되어 있을 때, 각 작품에 대한 인상은 전시 전체의 감상 속에서 각개의 변별 요소라기보다는 부분집합으로서 인지된다. 어떤 이미지들이 먼저, 또 나중에 떠오를 것인가? 동시에 범퍼의 영상들은 어쩌면 극장의 지위를 탐내는 방식으로 재생된다. 그들은 자신과 마주앉은, 헤드셋과 의자에 앉은 한 명의 관객에게 중심으로서 주목받기를 원한다. 어떤 스크린 앞에 마주앉더라도 관객들은 나를 주목하라는 이미지들의 힘 싸움에 휘말린다. 열을 따라 지그재그로 영상을 감상하건, 행을 좇아 각 작가의 행보를 살피건, 영상들은 서로 부딪친다. 무엇을 먼저 보고 또 누구를 다음에 보든, 모든 작업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달라서 변함없이 충돌한다. 충돌이란 만남의 또 다른 형태다. 그들은 하필 같은 전시장 안에 함께 설치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운명공동체다.

이미지들은 모두 다른 시공간에서 왔다. 만들어진 방법론 역시 각기 다르다. 동일한 풍경-캐나다의 온타리오 호수를 촬영한 <I love you Michael Snow>에서조차 그 차이가 드러난다. 모든 이미지들이 각자 가고 싶은 바가 다를지언데, 이들 간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비약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분명한 공통점은 보이기는 한다. 이들은 모두 디지털 이미지다. 움직이고 있다. 움직인다는 점에서, 생명체와 유사한 궤를 갖는다. 그러나 이들의 몸을 이루는 것은 피와 살과 뼈가 아니다. 이들의 몸은 내부적으로 01의 이진법 프로그램이며, 외부적으로는 점·선··색상·소리 등의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다만 첫눈에 보기에는 우리의 현실에 존재할 법한 피사체의 형태로 꿈틀거린다. 이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도처에 있다. 쇠퇴한 이미지들은 01 속에서 부활 가능하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사라짐에 대하여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일반적인 픽셀화의 우발적인 한 조각[각주:2]으로, 나타남이 없었기에 사라짐의 운명 또한 상실한 대상으로 평한 바 있다. 디지털 이미지들은 현실을 수치적으로 포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나고 사라지는 일 자체를 잃어버렸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는 중요치 않은 시대이므로-우리는 정말이지 온갖 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이미지의 귀중함이란 개념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디지털의 환영은 더 이상 늙지 않으므로, 그 운명은 그다지 팽팽하지도 않다.

두 명의 작가 또한 그 운명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라질 수 없는 이미지들이 사라질 수 있게끔 총력을 기울인다. 이미지들의 삶이라도 되찾아주려는 모양이다. 태어난 적 없는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로써, 그들은 각자의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그들이 만난 형상들을 바라보다, 기어코 손을 댄다. 쇼트들은 서로 부딪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본이었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혹은 함께 내걸린 스크린들과의 관계로 인해 그 자신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이미지들은 지시체로부터 떠나간다. 떠나온 곳에서 각자의 시공간을 구축한다. 범퍼의 모든 작업들은 이동하는 움직임의 과정이다. 지시 대상이 존재하는 현실을 떠나, 이미지들 각자가 또 다른 의의를 형성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 몸짓. 그들은 이미지들을 붙잡아 가능한 먼 곳으로, 애초 피사체가 가진 적 없던 새로운 운명을 향해 떠나보내고자 한다.

그들의 고집은 영상을 제작하는 방법론들로부터 시작한다. 범퍼의 영상들은 (동시대의 다른 영상 작업들과 마찬가지로)디지털 카메라 또는 편집 툴로써 제작되었다. 2020년에 와서 영상을 제작한 기기나 프로그램을 구태여 언급하는 일이 아무래도 사족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범퍼의 두 작가는 모두 필름 제작이 쇠퇴한 이후의 세대, 디지털 시대만을 주로 경험한 작업자들이다. 그들에게 이미지들은 디지털 제작물과 거의 동위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미지에는 다시 한 번 디지털이라는 오래된 형용사를 붙일 수밖에 없다. 작가들 자신이 이미지 자체를 다루는 과정에서 그 개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적분학의 데이터로 기록되되, 현실(작업자들 각자가 그들의 신체로 겪어온 시공간)과 다른 방식으로 탄생하여 작동해야 한다. 전시장의 스크린 속 지시체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아오는 수많은 사물들과 같은 이름 혹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다. 일순 이들은 제 2 롯데타워의 재현으로, 또는 토론토의 고층 건물이라거나 인천 부근의 등대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나 재생과 동시에 이들은 우리가 알던 세계의 규칙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쇼트 간의 배열 속에서 새로운 맥락을 얻거나, 편집 과정 안에서 낯선 외양을 획득한다. 그들은 재생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연계 속에서 새로운 장소를 발굴하도록 요구받는다. 범퍼01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프로그래밍 된 적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투쟁이다.

 

범퍼! Bump!》 설치 전경


투쟁의 몸짓은 각각의 작업마다 다른 태도로 나타난다. 가장 첫 번째 열의 작업들, 유일하게 외부 스피커와 함께 굴러가는 <I love you Michael Snow>범퍼라는 제목의 외연에 가장 잘 부응하는 작업이다. 두 개의 영상은 서로에게 어깨를 맞댄 채, 동일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굴러간다. 각 영상의 움직임들은 서로에게 있어 지극히 대비된다. 박세영은 호수 너머의 이미지들로 카메라를 고정한다. 대상 하나를 척도로 삼은 뒤 카메라를 돌린다!” 맨 처음 빌딩의 정경(처럼 보였던 것)은 뒤집히고, 회전하고, 흔들리는 과정에서 점차 색깔의 덩어리로 변한다. 반면 이소정은 본인이 직접 돈다!” 호수와 그 맞은편의 풍경들 중앙에 서서 빙글빙글 회전한다. 호수와 황무지는 극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희끄무레한 선으로 변한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움직인 뒤 다시 멈춘다. 다시 호수의 물결과 빌딩 숲으로 돌아오지만, 그 세계는 이미 갈라졌다.

두 개의 이미지는 길을 잃는다. 그들은 사라진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제 온타리오 호수는 전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 카메라의 기록 속에서 일차로 흔들린 형상들은, 편집 프로그램 내부에서 이차로 변형된다. 혹은 동일한 쇼트가 구간마다 반복하며 일정한 형상에 켜켜이 의의를 쌓는다. 이미지들은 다른 피사체와 엉겨 붙으면서 지시 대상들과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그들은 대상이 가졌던 본래의 모습(근사한 마천루와 호수)을 잃은 대신, 충분히 망가질 자유를 얻었다. 마천루의 꼭대기는 극단적 날카로움의 감각을 나타내려는 형태로 변환하며, 빌딩숲은 언제나 회전이 가능한 색채의 덩어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변형 가능한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시체들을 떠난다.

<Hold it!><Winodwlicker>의 열에서부터, 관객들은 각자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쓴다. 이 물리적인 조건이 관객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요구하면서, 시청각의 직접적인 충돌은 한층 약화한다. 이제 영상들의 범퍼는 좀 더 내부적인 것으로 변한다. 관객들의 내부에서도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영상에 대한 감상들이 부딪칠 것이다. 다만 좀 더 주목하고 싶은 쪽은 작가들이 작업 내부에 심어둔 장치들이 초래하는 충돌이다. 이 열에서부터 작가들은 각자의 이미지들이 갖는 무수한 가능성-무엇으로도 변형될 수 있으며, 어떤 가상이건 축조 가능하다-을 의식한다. 이로써 그들은 디지털 기기·프로그램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미지들을 제작한다. 이소정은 이후 나타나는 작업인 <Splash>와 마찬가지로, 촬영 기계를 인간의 신체가 아닌 다른 곳에 부착한다. <Hold it!>의 카메라는 스쿠터 뒤편에 매달리면서, 작가가 연출할 수 있는 형상들을 대폭 축소한다. 녹화 버튼이 눌리고, 카메라는 보다 우발적인 방식으로 바닥을 촬영한다. <Hold it!>에서 중시되는 것은 포착되는 지시체라기보다, 흔들림 그 자체에 있다. 이미지는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지시체-아스팔트를 최대한으로 배반한다. 렌즈가 포착한 시야는 흔들림을 극대화하면서, 아스팔트를 석유 화합물이 아닌 전연 낯선 물질로 보이게 한다. keygen의 노이즈와 시각적 흔들림이 공명하면서, 아스팔트는 기기묘묘한 상징으로 체화한다. 생물이 탄생하는 순간, 또는 벌레들이 우글거림 같다. 관객 중 누군가는 이후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보면서 아스팔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와 어깨를 맞댄 <Windowlicker> 또한 디지털 이미지들의 내부적인 흔들림을 가져오고자 한다. 연출자의 전면적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 그곳은 구글로 대표되는 웹 내부의 이미지들이다. 박세영은 자신이 보거나 만진 적 없는 이미지들을 가져와 가상의 타임라인을 만든다. 이곳에 기계-구글 번역기-의 목소리가 가세하며 새로운 규칙들을 형성한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대상들이 있다. 2 롯데타워와, 2007년 촬영한 강남구의 조감도가 그것이다. <Windowlicker>의 이야기, “롯데타워에 불현듯 등장한 빛의 기원을 찾아간다는 목적이, 이미지들을 재조립한다. 그 안에서 도심의 풍경은 빛의 추적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변화한다. 또는 빛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하는 외연으로써 움직인다. 누가 이들을 찍었는지(아마도 구글 맵 스트리트 뷰의 트래커들일 텐데) 몰라도, <Windowlicker>의 경로에서 본래의 용도들은 서서히 사라진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역할 속으로 녹아든다. 영상에 등장하는 납작한 빌딩은 실제의 구글 어스 속 이미지의 왜곡된 화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누구의 의도와도 맞지 않게 망가진 형상을 새로운 규칙 속으로 들여보내면서, 쓰러진 건물은 석양과 마주보는 지점으로 화한다. 그들은 <Winodowlicker>라는 그물망 속에서 (“빛의 근원을 찾는 게 쓸데없다/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혹은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운명을 찾아 나선다.

<Splash>는 전시장 내 작업 중 가장 직접적으로 사용한 기계의 특성을 드러낸다. 모든 푸티지는 물속에서 촬영되었다. 다시 말해, 방수 기능이 부착된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Splash>는 성사될 수 없다. 또한 모든 쇼트는 작가의 연출 없이 기록되었다. 이소정이 카메라를 바다로 던지면, 프로그램이 자동 기록을 시작한다. 이 때 뷰파인더를 확인하는 주체는 부재하다. 카메라는 단지 파도의 움직임에 맡겨진 채 물속의 시간을 포착한다. 연출하는 눈 없이 촬영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모범적인 형상들을 모두 배반한다. 이들은 부옇고 흔들리며, 선명한 중심축을 탈피한다. 대신 파도에 자신을 내맡긴 기계의 눈으로 내부를 바라다보길 권한다. 우리는 바다 아래 납작이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해초를 본다. 혹은 해초들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물 밖의 등대는 그 위치를 뒤죽박죽 바꾸며 나침반의 역할을 거부한다. 인간의 통제를 가능한 배제한 이들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없이 재현해온 감각의 새로운 틈새를 답사하고자 한다.

반대로 <Between the hotel and city hall>(이하 <Between>는 최대의 통제를 통하여 그 자신의 내러티브를 쌓는다. 여기에는 감각적인 규칙 몇 가지가 테제처럼 존재한다. 기계의 목소리가 녹음한 “Shot”“Reverse shot”을 번복한다. “shot”에서는 호텔이, “reverse shot”에서는 시청이 나타난다. 처음 이 내레이션은 이미지를 설명하는 주석 같다. 그러나 내레이션과 함께 나타나는 등장이 거듭 변화하면서, 목소리는 언명이 된다. “shot” 부를 때 눈을 휘둥그레 치뜬 여성의 사진이 등장하거나, “reverse shot” 호명과 함께 불꽃이 터지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호텔-시청의 진화체로 받아들인다. 규칙 안에서 언어는 의미를 달리하고 이미지는 하나씩 탈피를 시작한다. 마침내 비행기 안의 화면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어지러워진다. 처음의 이미지들은 사라지고(그러나 영상이 끝난 뒤에는 또 한 번, 등장할 것이다), 호텔과 시청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미지들은 의미 너머의 것을 갈구하는 몸짓을 이미지로 드러낸다.

네 번째 열의 <사랑 (사이) 깍두기><Romantic Machine> 사이에서는 거의 마찰이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맥락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때더 정확히 감상할 수 있다. 우선 두 영상의 길이는 모두 60분이 넘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위캔드 내 공간에서 관객들은 각자 60분씩만 예약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예상치 못한 문제로 인해 생겨난 환경이다. 그러나 그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전체 전시 환경 자체가 1:1 관람을 필요로 하며,-각 영상에 연결된 헤드셋은 하나뿐이다-하나의 영상에는 하나의 관객만이 참여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네 번째 열은 다소 무거워진다. 만약 이것이 작가들의 의도라면, 범퍼의 영상들은 일부분만을 관람할 수 있도록, 혹은 몇 분만 관람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도를 캐치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두 개의 영상은 분명 순차적인 감상에 더 적합하다. <사랑 (사이) 깍두기>에 등장하는 유기농맥주의 영상은 그 시간성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 훨씬 짙은 농도를 지닌다. 이 유사한 얼굴들이 매해,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형태적으로 유사한 행위(합주와 공연)를 번복해왔기 때문이다. <Romantic Machine> 역시 마찬가지다. 빛들의 등장은 치밀한 구성 끝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광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빛과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는 암흑과 고요다. 등대라는 주인공이 스크린의 광원으로 번지는 클라이맥스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극장과 같은 독립된 장소가 필요하다.

반면 뒤편의 영상들-대망의 마지막 <Murika!><Julie>은 서로에게 엮이는 과정 속에서 의의를 확장한다. 두 영상의 격차는 너무도 극명하여, 가벼운 문장들로 분리할 수 있을 정도다. <Murika!>는 말이 많고 <Julie>는 고요하다. <Julie>는 느릿하고 <Murika!>는 부산스럽다. 다루는 색상의 톤 역시 극명하게 대비된다. 멸망 직후처럼 붉게 저문 <Murika!>의 우주에 비해, <Julie>의 우주는 한낮의 쨍한 해안가 속에서 희고 푸르다. 잠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둘을 동시에 조망하면, 각각의 리듬은 너무 달라서 차라리 하나의 세트처럼 보인다. 동일한 배경을 각자의 스타일로 움직인 <I love you Michael Snow>와 달리, <Julie><Murika!>는 그들 각자의 움직임을 담을 수 있는 적합한 배경에서 시작했다.

<Murika!>의 배로 이동한다. 조그마한 선박이지만, 그렇기에 그 요동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Murika!>의 풍경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서-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바다를 가리고, 자막들은 알아보기도 전에 지나가며, 소리와 이미지는 매번 어긋난다.-한 지점에 집중하기란 어렵다. 박세영은 다른 작업들에서 계속 그래왔듯, 여기에서도 대혼란을 꾀한다. 그는 혼돈을 정리하는 대신, 혼돈 속에 들어가 보기로 결단한다. 그 순간 이곳은 오해와 왜곡이 진실인 세계가 된다. 가끔은 “seagulls!” 부를 때 갈매기들이 날아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온갖 층위가 얹힌 우주와 석양이다.

<Julie>의 바다는 너무 거대하기에 멈춘 듯 보인다. 그 안의 무수한 움직임들을 한 번에 알아보기란 어렵다. 바위들은 실제로 멈춰 있다. 다만 몇 차례 분할된 쇼트로 반복하여 나타난다. 갈매기(여기서는 seagulls가 아닌, Julie의 이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새)나 해안가의 이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반복하여 등장하는 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Julie>의 태양은 물속에서 흔들리며 하나씩 늘어난다. 바위들은 갈매기를 떠나보낸다.

얼핏 보기에 두 작업은 다른 영상들보다 훨씬 얌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손을 최대한 배제하려 한다거나, 기계의 목소리로 서사를 구성하려는 몸짓은 여기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같은 동작은 이들에게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Hold it!>의 아스팔트에 흔들림이 어울리듯, <Julie>의 바다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Between>이 목소리 안에서 형상을 구축해가듯, <Murika!>는 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픽션을 발견한다. 영상의 뼈대는 촬영한 쇼트들의 내부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로써 이미지는 자신들에게 적합한 신세계를 발견하며, 동시에 근원이 된 지시체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범퍼! Bump!》 설치 전경

 

그들의 이미지는 여전히 사라지지 못한다. 이들은 언제고 복사될 수 있으며, 사라질 일이 없기에 마땅히 애틋해질 수도 없다. 그 대신 그 자체가 하나의 허구로, 우화로 남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사건이라는 풀리지 않는 허구에 공명[각주:3]에 가까워질 때까지 멀어져 가고자 한다. 이미지들은 자신의 근본을 왜곡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조성할 수 있는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빛을 추적하는 모험담이기도 하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해초들이며, 대혼란의 틈새이고, 바위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미지들은 자신의 몸체였던 것을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자 애쓴다. 지시체들로부터 떠나온 이미지들은 영혼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영혼들이 충돌하는 순간 무엇이 새로 태어날까? 충돌은 언제나 움직임 속에서 발생한다. 영상은 재생하는 그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달려가며, 타임라인이 끝나면 다시금 시작한다. 이미지들은 스크린 안에서 운동을 되풀이하며 재차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디지털 수신호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 마주앉아서 전면으로 부딪칠 때, 그 충돌의 대화가 시작되면서, 범퍼는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적 없이 투명한 몸들을 내보인다. 몸들은 뒤집힌 땅 위에 서 있다.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가 전혀 다른 감각에 접속하도록 손짓한다. 그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1.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31페이지, 민음사, 2014. [본문으로]
  2. 같은 책, 79페이지 [본문으로]
  3. 같은 책, 65-66페이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