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비주얼에 대한 가설 (1) – 의사-지지체로 작동하는 ‘이미지’
권시우
오디오 비주얼이란 무엇인가? 오디오 비주얼은 본래 실황으로 진행되는 사운드 작업과 그것의 전개를 임의적으로 시각화하는 영상 작업의 협연을 의미한다. 협연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 대다수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준수하며,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작업에 내재된 개념적인 레이어들과 무관하게) 무엇보다 다채로운 감각을 실시간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편의적인 수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는 점차 잊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지난 2016년에 발간된 영상 비평 전문지 <오큘로> 1호의 주제는 “오디오비주얼 리서치,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인데, 정작 해당 잡지에 게재된 글들 대다수는 아티스틱 리서치에 기반한 무빙 이미지 작업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즉 <오큘로> 1호에 참여한 필진들은 무의식 중에 오디오 비주얼과 무빙 이미지를 혼용하고 있다. 혹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이란 “리서치”라는 행위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감각”적으로 변환하기 위한 (무빙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청각적인 장치를 대변한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한 가지 의미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는 그것의 무분별한 용례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상기할 점은 오디오 비주얼은 무빙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으며, 단순히 무빙 이미지의 하위 장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오디오 비주얼이 무빙 이미지와 자주 혼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말 그대로 오디오와 비주얼의 협업을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일련의 작업들을 주도하는 것은 엄연히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이며, 이때의 ‘이미지’는 무빙 이미지에서와는 달리 일종의 지지체로 작동한다. 지지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한데, 엄연히 말해 그것은 포스트-미디엄post-medium의 문제와 연루된 ‘기술적 지지체’와는 변별되는 개념으로서, 오디오 비주얼의 작동 방식의 특정성을 반영한다. 즉 오디오 비주얼이 사운드에 의해 주도된다고 했을 때, 통상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청취의 경험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감각의 차원을 벌충하는 역할을 한다. 작중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설사 그것이 (순수 청각성의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됐을 때조차, 무/의식적으로 관객의 ‘눈’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일종의 시각적인 대체재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이해관계에 의해 ‘이미지’는 순전히 작업 내에서 서포터Supporter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디오 비주얼을 독립적인 매체로 상정했을 때, ‘이미지’는 ‘사운드스케이프’의 배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사-지지체로 작동하지만, 주지하듯 그것은 사운드 작업의 전개를 임의적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스크린을 매개로 장식적인 효과를 구현하기도 한다. 그러한 양가적인 조건은 ‘이미지’의 정체를 갈수록 묘연하게 만든다. 즉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분명 서포터로 동원되지만, ‘사운드스케이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사실상 불필요한 장식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사운드와 ‘이미지’의 협연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공연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라이브 퍼포먼스 형식으로 상연되는 작업 대다수에서 ‘이미지’는 사운드에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반응하거나, 때로는 사운드의 개요와 전혀 무관한 클립들로 구성되곤 한다. 만약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가 ‘이미지’를 지지체 삼아 작동하는 사운드라는 가설이 허용된다면, ‘이미지’는 지지체가 되기 위해 사운드에 내재된 메커니즘을 보다 체계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이 실시간으로 구현하는 “다채로운 감각”은 관객에게 그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제 우리는 감각이라는 유동적인 지층의 이면에서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매체적 조건에 대해서 성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고정 불변의 비/물리적인 지지체가 아니라, 특정한 사운드 작업의 메커니즘을 수용하는 방식에 따라 매번 다르게 지지체로 가시화된다. 이때의 사운드 작업은 작가가 임의대로 취합한 각종 서사적인 모티프와 레퍼런스와 같은 “지식”을 순수 청각성의 문법으로 구사하면서 나름의 내러티브 구조를 형성한다. 결국 ‘이미지’가 지지체로 가시화된다는 것은 이미 청각으로 구현된 내러티브를 토대로 사운드 작업의 방법론을 복기해내고, 그것에 시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결과물이 스크린에 투사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사운드 작업에 대한 시각적인 재현으로 귀결되는 대신, 청취의 경험에서 비롯한 감각의 차원을 (사운드와 조형적으로 매개된) ‘이미지’를 통해 재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이란 언제나 조형의 산물이며, ‘이미지’는 사운드의 전개와 병행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거듭 주지한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장식”의 위상에서 벗어나, 지지체로서의 역할을 점유한다. 그 결과로서의 오디오 비주얼은 최근 국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과는 확실히 대조된다. 후자의 경우, 관객은 대체로 영상의 문법을 경유해 작업을 ‘이미지’로 경험하기보다, 자막이나 내레이션과 같은 텍스트에 기반한 장치를 통해서 서사의 개요를 납득하게 된다.
즉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에서 영상 매체의 조형성은 충분히 작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관객이 텍스트(혹은 스크립트)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게끔 유도하는 장식적인 삽화를 연출하는 데 그친다. 물론 간혹 파편적인 담화를 통해 작업의 서사를 변칙적으로 운용하려는 일련의 실험들이 존재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의 관점에서 텍스트라는 형식은 점차 고루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이미지’는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유력한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부상하면서, 우리에게 텍스트와 무관한 새로운 가독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때의 새로운 가독성이란 결국 ‘이미지’를 지각하는 방식과 연루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마침내 상징 수단으로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이 당면한 ‘이미지’ 그 자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이미지’를 단순히 감각적인 소비재로 환원할 여지가 있지만, 주지하듯 감각이 여전히 “조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무빙 이미지는 자신의 조형성을 감각적인 차원으로 변용함으로써, 충분히 ‘이미지’ 그 자체로 투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추상 영화abstract film에서의 순수 형태의 지각으로 회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무빙 이미지 작업이 의도한 내러티브가 “텍스트와 무관한 새로운 가독성”에 기반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빙 이미지가 반드시 디지털 네이티브의 감수성을 체화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의 작업들이 텍스트(혹은 스크립트)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정작 ‘이미지’를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한다면, 무빙 이미지의 정체성은 갈수록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가 의사-지지체로 작동한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사운드 작업에 내재된 메커니즘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재고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이미지’의 방법론을 무/의식적으로 활성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사운드 작업이 순수 청각성의 문법을 통해 구현한 내러티브 구조를 조형적인 차원에서 수렴하고, 종내 그것을 가시화하면서, 라이브 퍼포먼스의 현장을 ‘사운드스케이프’에 국한되지 않는 공감각적인 무대로 변환한다. 이때의 내러티브는 텍스트를 매개로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와 ‘이미지’가 공유하는 감각이라는 프로토콜을 통해 말 그대로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때의 체험은 오디오 비주얼에서 통용되는 샘플링과 매시업과 같은 다양한 기술적 관습들에 의해 유동적으로 조절/조율되면서, 고전적인 서사의 형식에서 반복됐던 선형적인 전개를 의도적으로 위반한다.
그렇다면 오디오 비주얼은 기존의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후자는 “파편적인 담화”에 기반한 실험을 보다 심화하면서 내러티브 구조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효과적으로 재매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묘연해 보인다. 반면 오디오 비주얼이 구현하는 의사-지지체라는 환영은 사운드 작업에 내재된 메커니즘에 의해 ‘이미지’의 방법론이 좌우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를 매체적 조건을 통해서 합의한다. 이는 지나치게 청각 중심적인 언사로 들리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지’에 선행하는 사운드라는 전제는 오디오 비주얼의 본래적 의미를 환기하기 위한 가정일 뿐, 실제로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조형적으로 매개된 채 서로의 방법론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일종의 폐쇄회로를 형성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의도에 따라 양자 모두가 서포터로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며, 이를 통해 오디오 비주얼은 마침내 감각이라는 “조형적인 산물”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을 지각하면서, 그것의 내러티브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가독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오디오 비주얼은 대체로 라이브 퍼포먼스를 준수하지만, 만약 그것이 무빙 이미지와 상응하는 독립적인 매체라면, 얼마든지 전시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 혹은 감각에 기반한 “새로운 가독성”으로 인해 내러티브라는 개념이 급진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현대미술은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를 충분히 재고해야만 한다. 그러나 최근 국내의 미술계는 일련의 작업들을 전시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이색적인 이벤트 정도로 취급할 뿐, 오디오 비주얼이 무빙 이미지 이후의 새로운 방법론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만약 무빙 이미지라는 형식 내에서 만연한 서사 의존적인 경향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미지’는 종내 (기존의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에서처럼) “불필요한 장식”으로 전락할 것이다. 반면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사운드 작업과 공유하는 내러티브 구조를 토대로 (스크린을 매개로 한) 감각적인 파사드Facade를 조형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과 같은 방식을 구사하면서, 무빙 이미지가 의존하는 스크린이라는 형식을 의도적으로 초과한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에서 ‘현장성’은 중요한 전제이지만, 그와 별개로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은 전시장이라는 플랫폼에서 자신이 의도한 감각의 층위를 보다 체계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
결국 의사-지지체라는 개념은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임의적인 가설에 가깝다. 여전히 오디오 비주얼을 주도하는 것은 사운드 작업이지만, 그것은 이제 반드시 ‘이미지’에 선행하지 않으며, 다만 감각이라는 프로토콜을 통해 ‘이미지’와 연계될 뿐이다. 이로써 오디오 비주얼은 단순히 무빙 이미지와 혼용될 뿐인 애매한 단어가 아니라, “지식”을 포괄하는 내러티브 구조를 “감각”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매체로 거듭난다. 무엇보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시/청각적인 장치들은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무빙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라이브 퍼포먼스의 여부와 무관하게, 오디오 비주얼은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을 보다 “다채로운 감각”으로 점유하고, 그 안에서 전개되는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재/편집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활성화된 “공감각적인 무대”에서, 관객은 결국 작업 차원에서 잔존하는 서사를 “체험”하면서 일순 압도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무의미한 혼란을 유발하기보다, 우리의 “새로운 가독성”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시와 공연 사이에서 오디오 비주얼에 대한 실험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