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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동'세대' 미술에 관한 코멘터리

[흑화된 A의 이야기] - ‘신생’공간이라는 허명

[흑화된 A의 이야기] - ‘신생공간이라는 허명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그간 신생공간에 관한 글들을 더듬거리며 써왔으나, 여전히 신생이라는 명제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4년을 전후로 나에게 급작스레 감지되기 시작한 제도 미술계 외부의 ()공간적인 거점들을 과연 무엇으로 명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자체가 사실상 기각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제도 미술계 외부의 ()공간적인 거점들.” 사실 이러한 표현 자체도 지나치게 기나-긴 변명투의 수사 같다. 어찌됐건 당장 글을 써내기 위한 임시적 방편으로써 공간들에 대한 수사를 거듭 번복해왔다.

 

이를테면 대안, 신생, 신진과 같은 수사들은 개별 공간들의 각기 다른 특정성을 호명하기 위해 매번 고쳐 쓴 결과라기보다 실상 공간 이후의 잔해들과 대면하며 그럼에도 어떤 연속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헛)욕망의 소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에 몇 수 앞질러 대뜸 정치적 뉘앙스만을 가득 담아 미간을 찌푸리며 거점!”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별다른 실효성이 없을뿐더러 민망한 일이다. 윤율리 씨가 반지하 텍스트에 게재된 글1)에서 밝혔듯 그것들은 누군가의 작은 월셋방에서, 작가들이 아름아름 모여든 작업실에서, 명시된 이름의 어떤 유/무용한 공간들에서 비롯했으며 결코 단일한 구호 아래 일사분란하게 헤쳐모인 전초기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처럼 개별 거점들의 상이한 좌표와 미묘한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굳이 2014년을 최근 미술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의미한 지표로써 술회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시점에서 불거졌던, 이를테면 청년에 관한 일련의 이슈들이 어떤 식으로든 개별 거점들에 개입하며 한시적으로나마 (순전히) 가상의 플랫폼 노릇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서없는 글에서 청년관에 관한 유효성을 새삼 되짚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전의 내가 청년이라는 범주를 일종의 전략적 회심으로써 낙관했던 반면, 지금으로써는 지난 월간미술 2월호에 게재됐던 강수미 씨의 글에 관한 sns상에서의 소요가 불과 몇 달 전일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청년에 대해 힘을 싣기에는 조금 벅차다는 것이다. 물론 작업적 세대교체에 대해서 전면적인 무효화를 선언해버리는 해당 글에는 여전히 동의하기 힘들다. 어찌됐건 그 짧은 시간 새, 판세는 빠르되 미묘한 방식으로 변화했거나 일정 부분 누락됐다.)

 

관련한 이슈들의 결과를 매우 사적인 의미에서 토로해보자면, 앞서 언급했듯 거점들의 대강의 정체, 혹은 생사여부를 본격적으로 감지하게 된 것은 역시나 2014년이었다. 분명 그 이전에도 거점들은 지금의 형태로 귀결된 나름의 역사적 연보를 축적하고 있었겠지만, 최소한 유능사 주최의 좌담회를 통해 청년관이라는 구호와 맞닥뜨렸을 당시에는 안타깝게도 그 이전의 과거를 모두 소급한 상태는 아니었으며 심지어 패널로써 참석한 몇몇 신생공간들의 존재 자체마저 나에겐 새삼스럽게 들렸다. 즉 내가 가장 밀착한 범위에서 형성된 미술계란 포스트모더니즘도, 컨템퍼러리도, 2008년 이후의 대서사도 아닌 본격!” 2014년부터인 셈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별다르지 않은 개인사다. 그러나 이 별다르지 않음에 주목해보면 공간 운영 주체도, 작가도 아니며 당시 가상의 플랫폼으로써 감지된 영역에 별다른 매개항이 없던 는 소위 비-플레이어 참가자의 전형적인 표본 같은 인물인 셈이다. 달리 말해 SNS라는 창구를 통해 파편적인 정보들을 수집함으로써 ()현실을 구상해내는 데에 능한 다수의 예비된관객들에게 공간들은 이전의 과거가 소거된 채, 말 그대로의 신생으로써 단번에 대면된 셈이다. 무엇보다 90년대 태생인 나로써 청년관과 함께 덮쳐온 신생들의 좌표는 마치 내가 언젠가 편승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꽤 훌륭한 난파선 같은 것이었다.

 

이후 공간은 지속적으로 파생되거나 새로이 감지되며, 엮는자의 맵핑 작업에 따르면 2015719일 기준으로 대략 25여개 정도가 서울에 산개해있다. 그것이 공간이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공간들은 과포화되었다. 청년관과 함께 일종의 착시로써 인지됐던 개별 공간들의 총합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가시적 통로들이란 가상의 플랫폼은 거점!”이 무효하듯 지도상의 좌표를 통해서나 재확인될 뿐이다. 그러므로 나름의 입지를 획득한 몇몇의 공간들을 제하면 나머지의 시선들은 한없이 분산되기를 예비하고 있다. 짧고 빠르고 미묘한 낙차 사이에, 더 이상 자발적인 신생공간을 마련해 비-플레이어 참여자에서 벗어나 기꺼운 청년의 후발주자로써 카운트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득 자문하게 되는 것은 달리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신생이라는 표현은 지금 여기를 겨냥하지 못한 채 곧바로 과거형으로 미끄러진다. 분명 2014년의 어느 시점에서 그것들은 신생으로써 수면 위에 떠올랐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신생으로써 온전히 성사됐던 적이 없다. 그 이면에는 다만 임대성의 공간, 그에 따라 도저히 물리적 경계만으로 구획되지 않는 비공간이 어떻게든 현재의 윤곽을 지연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 거점들은 이토록 불분명하며 마냥 신선한 활기와 가치2)를 부여하고 있지만은 않다. 플랫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임대의 외연일 뿐이다. 최소한 2014년 이전과 단절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재구성된 의 미술계의 타임라인은 그런 식으로 재구성된다.

 

나는 그곳에서 인터넷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갱신된 좌표와 스케줄러를 참조한 뒤 스마트폰 지도 앱과 대차대조하며 내킬 때마다 전시, 전시가 아니라면 그로부터 파생된 일련의 활동들을 보러 다닌다. 엮는자에 수록된 25개를 전부 소화했는가, 자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들에 애초에 과거가 있었는가, 자문하는 것 또한 나로서는 마찬가지다. 계약으로 연장되는 현재형의 과거를 반드시 개별적으로 인지할 필요는 무엇인가? 속단하자면, 지금 시점에서 그것들은 이미 과거의 영역에 속한다. 25개는 결국 추가되거나 소모될 것이며,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숙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p.s) 언젠가는 결국 공간들도, 공간들 자체에 의태한 작업들도 전면적인 무효화를 선언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지금의 신생들의 남상점이 아닐까 낙관해본다. 신생공간들이 설사 불연속적으로 조성된 판단유예의 장이라 할지라도, 외려 그렇기에 더더욱 그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작업들을 비평적으로 재고하는 일은 여전히 유의미할뿐더러 적잖게 흥미롭다. 지금의 터무니없는 공간감과 개별 작업들이 상관하는 방식을 관객으로써 효과적으로 대면하지 못한다면, 비로소 남상점이 돌파되었거나, 역으로 재차 납작해졌을 때 그 순간조차 명확히 인지되지 못하고 공간()과 함께 휘발될 것이다.


1) 하나의 유령이 미술을 배회하고 있다, 윤율리, 반지하 TEXT (http://vanziha.tumblr.com/tagged/text)

2) 국립현대미술관을 박차고 나온 젊은 예술가들, 현시원,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8511&ref=nav_search%222015%EB%85%84)



ㄱㄴㄷ. 2015719일 현재 파악된 신생공간 25엮는자(@herbererr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