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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킨 : 본뜨고 연결하기>, 납작함과 납작화

jipdanochan 2015. 8. 9. 21:22

<뉴 스킨 : 본뜨고 연결하기>, 납작함과 납작화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마침내 공간이 납작해졌다고 했을 때, 어느덧 ‘납작함’ 자체는 별다른 이질감 없이 일상 속에 삽입된다. 더불어 뉴미디어 환경의 주요한 변곡점으로 묘사되는 아이폰 3GS의 보급은 어느덧 실제 물리적 시간차와 별개로 이미 과거형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 이후 거듭 갱신되거나 번안된 모델들이 ‘근과거’보다 한층 더 광범위하게 보급됐으며 한때 아이폰이 지시했던 스마트폰의 독특한 물성은 사용자들의 손에서 익숙한 그립감으로 무뎌졌다. 물론 스마트폰의 화면 안에서 포착되거나 조감되는 공간의 그립감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과연 그런 맥락에서의 “스마트폰의 보편화”라는 공공연한 사실을 세대적 단절이라는 명제와 대응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다소 터무니없어 보인다. 지금의 시점에서 스마트폰은 ‘보편’이라는 수사가 전연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대를 막론한 모두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범주의 군상들이 스마트폰의 접촉면으로써 형성된 공간 속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몰입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이는 엄연히 말해 오로지 세대에 의한 단절이라기보다, 특정 세대가 그러한 (비)공간으로 하릴없이 이전되는 방식에 가깝다.


<뉴 스킨 : 본뜨고 연결하기(이하 뉴 스킨)>속에 전개된 작업들을 포괄하는 것은 일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반사작용으로써 튀어나온 자포자기의 심리다. 뉴 스킨이라는 전시 자체를 실제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대한 역상으로써 투박하게나마 도식화해보자. 마치 도심 한 가운데 일어난 싱크홀처럼 미술관이란 특정 구간에서 역상된 ‘도시’는 분명 그러한 상태를 증언하는 다종의 이미지로써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총합이 결코 일관된 풍경, 혹은 공간을 담지하진 못한다. 외려 대면되는 것은 그러한 잔상들이 무던히 공회전하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김희천의 <바벨>은 그러한 부재의 상태를 ‘조형’해나간다는 점에서 본 전시에 대한 확연한 지표로써 구실한다. 영상은 화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서간 형식으로 읊으면서 시작되지만 결국 죽음이 최종적으로 소거하는 대상은 사고가 발생했던 구글 맵 상의 좌표를 통해 역추적되는 도시 공간의 실재감이다. <바벨>에서 등장하는 그래픽으로 본을 떠낸 도시 모형은 데이터베이스화된 경험과 구글 맵으로 상징되는 납작한 표면을 애써 3d로 부조해냄으로써 나름의 구체성을 부여하고자 한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결코 실재로 되돌려지지 못한 채 조악한 텍스처의 입상으로써 귀결될 뿐이다.


김희천, <바벨> 일부


이후 전개되는 영상은 공간으로써의 윤곽을 상실한 도시 모형을 서슴없이 투과하거나 그 사이의 경계에 무더기로 겹쳐지는 입상으로써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이를 과연 손쉽게 디스토피아로 호명할 수 있을까? 분명 <바벨>은 화자의 독백과 연동되며 어렴풋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이루지만 정작 제시된 것은 결코 내러티브로써 전개될 수 없는 도시 경험의 전제조건들이다. 그것들 자체는 결코 온전한 경험체로써 재구성되거나 부조될 수 없다. 결국 <바벨>의 완결된 영상으로써의 서사는 디스토피아를 구성하기 위한 영화적 화법이라기보다 기존의 공간감에 기반한 서사 자체가 폭락한 상황을 증언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박민하의 <전략적오퍼레이션 비즈니스카드 A/B>는 이런 식으로 폭락된 서사의 중량을 헐리우드 영화 세트를 기반으로 설립된 포트 어윈 군사 훈련소의 사례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예증한다. 고도로 시뮬레이션화한 전장의 이미지란 그 자체로 별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인용이되 그 안에서 반복되는 훈련이 실은 철저히 모델링된 공간을 분쇄함으로써 외려 공간의 실재감을 지속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기묘한 순환 구조를 이룬다. 탄환으로 상징되는 폭력은 허구의 조형물을 실재로써 분쇄하기 위해 발사되거나 장소에 매립된다. 그러나 결국 양자는 동일하게 모델링된 무대 장치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실패하거나 무감해진다. 실제 박민하가 천착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오발된 ‘탄환’의 자취인듯 보인다.


박민하, <전략적오퍼레이션 비즈니스카드 A/B> 일부


해당 훈련소는 과거 헐리우드 영화의 세트장으로 구실함으로써 가까스로 보존된 내러티브에 대한 기억이 불식(되거나 더 이상 내러티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컴퓨터 그래픽스로 대체)된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마침내 온전히 비공간으로 귀결된다. 이는 김희천의 작업에서처럼 서울이라는 특정적 도시를 지시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양상으로 복각된 3D의 요소들이 허구적으로 상관하는 교차범위를 드러낸다. 이처럼 이들의 작업이 이미 납작한 평면이나, 납작해진 과거로부터 부조된 모종의 형상을 증언하는데 비해 강정석과 강동주는 유사 1인칭 시점으로 몰입한 상태에서 몸소 현실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강동주의 ‘달’ 연작은 급격히 변화하는, 그러므로 결코 하나의 상으로써 포착될 수 없는 도시의 일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보다 명확한 지표인 달의 이동 경로를 쫓는다. 그런 식으로 묘사된 달의 운행에 관한 일련의 불연속적인 드로잉들은 개별 장면 마다 도시 내부에서 작동하는 역학이 순전히 가상 차원에서 정지됨으로써 역으로 도시를 이미지로써 포착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확보될 수 없는 도시의 시점인 한 결과는 얇게 벼려진 낱장들로써 매우 흐릿한 인상으로 제시될 뿐이다.


강동주, <달은 어디에 떠있나> 일부


마찬가지로 강정석은 그런 맥락에서의 예정된 실패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작가의 지인으로 호명되는 동세대 특정 인물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모습을 반복 촬영한 영상은 그에 자연스레 수반되는 이미지들, 이를테면 지하철 객차 안에 투사된 주변 풍경을 두서없이 나열한다. 문제는 홈비디오 형식을 취하는 본영상의 시점이 실은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의 1인칭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것은 손에 쥐어진 채 부유하며 자신이 응시하는 지점을 기록하는 척 하지만 정작 배웅이라는 표면적 행위가 상정하는 기록의 대상은 배웅되는 작중 A, 혹은 지하철역의 개찰구에서 작가가 A와 헤어지는 순간이다. 즉 나머지는 그저 여분의 이미지들이며 그것들은 강동주의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벼려진 스틸still들이다.


강정석의 <시뮬레이팅 서피스 A>가 포착하려했던 (도시를 관류하는 와중에) 개개인에게 망각된 속도감은 스마트폰 시점을 매개로 불현듯 의식화되는 순간, 그것이 작동되기 이전에 놓쳤던 순간들로 인해 재차 좌절되고 그러므로 거듭 반복된다. 이에 대칭되는 <시뮬레이팅 서피스 B>는 A에서 어찌됐건 축적된 도시 경험의 폐쇄회로를 선뜻 자포자기하며 특유의 ‘등신미’를 발휘해 현란한 도트 이미지들로 뒤섞거나 기록된 장면 자체를 허공 위에 입면들로 재배열시킴으로써 그것들의 한없이 얇은 두께감을 자체 폭로한다. 김영수의 <우주시민 A씨의 데카드>는 언뜻 그 ‘이후’에 대한 전략처럼 보인다. 공간의 납작함으로부터 파생된 이 모든 예정된 실패의 기록들의 틈에서, 보드게임 형식이 담지한 모종의 규칙성과 그를 토대로 한 유희의 방식은 인터페이스의 룰 자체를 플레이하는 순간을 기꺼이 연출해낸다.


강정석, <시뮬레이팅 서피스 A> 일부


이처럼 뉴 스킨은 각자가 하릴없이 이전된 (비)공간으로부터 파생된 작업들이 마침내 한 지점에 헤쳐모인 결과다. 분명 목적론적인 장소 특정성은 휘발된 지 오래지만 지금의 ‘신생’들에게 주어진 공간감이란 필터는 결코 쉽사리 소거될 수 없다. 애초에 이들이 뉴 스킨 이전에 작업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거나 제시했던 공간적 토대는 일종의 메타 장소성이라 할 만큼 특정적이다. 이를테면 ‘신생 공간’이라는 거점들이 각자 점유한 한정된 면적과 공간 자체에서 드러나는 요철은 지금 당장 열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시들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시-됨”의 이면에는 실상 우리 모두가 무의식중에 몰입하고 있는 왜곡된 세계상, 즉 앞선 불안정한 토대에 적응하거나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 차라리 미끄러지는 과정의 연속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전제조건은 설사 화이트큐브라는 백색평면에 도달할지언정 반드시 개별 작업들과 연동된 채 징후로써 표출된다. 김동희의 <나열된 계층의 집> 프로젝트는 신생 공간으로부터 이전된 여타의 작업들을 물리적 구조체로서 지지하며 그것들의 불균질한 접면을 가까스로 형태화하지만 여전히 본질적 문제는 미봉으로 남은 상태다. 이를테면 뉴 스킨에서 헤쳐 모인 작업들은 여전히 공간들이 회전하는 속도감에 맞춰 얼마든지 편의적으로 재조립될 수 있는 키트kit화된 모델에 가깝다. 김동희의 구조체가 그러한 역학을 감속하는 전략을 취한다면, 보다 완결된 해결책은 키트로써의 작업들이 이미 철저히 감속된 채 멎어있는 화이트큐브를 향해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재조립되는 양상일 것이다. 이때 납작한 질료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물론 뉴 스킨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라기보다 급격한 낙차 사이에 이루어진 일종의 모의실험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