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 x 김희천 x ? – 유닛으로 질주하기>
<강정석 x 김희천 x ? – 유닛으로 질주하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 2017.2.1 ~ 2.7 산수문화에서 진행한 <비평실천>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해당 전시는 참여 비평가들의 글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 하에 집단오찬에 게재합니다. 글의 소유권은 필자에게 있고, 전시 이후 휘발되기보다 명시적인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에 일종의 해적판으로 공유하게 됐습니다. 혹시나 일전에 <비평실천>을 관람했거나, 관련한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분들은 이를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ttp://sansumunhwa.com/critic/)
프롤로그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지도 앱을 참조하며 실제의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리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방위 센서에 따라 지도 인터페이스 상의 ‘유닛’1)이 자신의 시점을 (재)조정한다. 이를 지표 삼아 내가 걸음을 옮기면 유닛 또한 마찬가지로 납작한 텍스처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유닛은 나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사용자인 내가 위치 서비스를 비활성화시키면 다중 위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방송되는 중인 GPS대역과 나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치 수신기와의 매개는 일단락되며 그로 인해 유닛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달리 말해 유닛과 유닛의 세계의 성립 여부는 오로지 나로 인해 좌우되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나와 동기화된 별도의 세계를 투영시킬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주지하듯 유닛은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유닛은 내가 아니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부속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의 권한, 즉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유닛은 내가 의식하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유닛의 경험은 나의 경험의 반영이다. 유닛은 스마트폰 속에서 나와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면상에는 분명 유닛이 전제하고 있는 시선의 방향성이 있다.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를 활성화해 각자의 유닛을 확인해보자.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려 유닛이 쳐다보고 있는 각각의 방향을 가늠해보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불능감을 위한 인벤토리
유닛의 세계란 결국 어떤 “불능감”에서 연원한다. 이를테면 강정석은 지난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GAME Ⅰ>의 특별공략에서 이를 비디오게임의 연대기와 대조하며 “초기 하드웨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제약은 검은 평면 속에서 즐거움과 동시에 불능감을 발견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불능을 해결하려는 행위가 새로운 불능을 발견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솔루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상술한다. 이때의 솔루션이란 비디오게임의 사용자와 호환되는 각종 주변기기들의 목록으로 구체화된다.2) 달리 말해 CRT모니터 속에서 도트 형식으로 존재하는 캐릭터/아바타와 사용자 간의 간극, 즉 특정 유닛이 나와 온전히 연동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불능은, 도트로부터 폴리곤으로 외형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점차 변화한 컴퓨터 그래픽스의 발전과 별개로 불능 자체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대리적인 접촉(물)을 파생시켜왔다.
컴퓨터 그래픽스 환경과 주변기기를 임의로 구분 짓고, 후자의 관점에서 게임이라는 매체를 재고해보면 해상도의 문제가 반드시 시각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해서 논의할 때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은 ‘실사와 흡사한 대상’이 아니라 현실과 별개의 영역에 놓인 독자적인 세계관을 사용자가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때 발생하는 불능감은 양가적이다. 게임 속 세계관이 현실에서의 커브와 맞닥뜨릴 때 사용자는 문득 화면과의 거리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 사용자의 감각과 점차 최적화된 주체가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역으로 계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곧잘 사용자에게 유발되는 정신착란이나 각종 FPS나 전쟁 시뮬레이션 등의 게임 컨텐츠의 윤리성 문제와 같이 동시대의 병리적 증상을 규명하기 위한 상투형의 객관식 문항들로 나열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요한 것은 게임적 리얼리티가 유발하는 일방향의 몰입감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일종의 잔여의 전류일 뿐이다. 실제로 강정석이 <GAME Ⅰ>에서 전개하는 서사는 미처 혼선되거나 증강되지 못한 현실을 사용자의 관점에서 앞지르기 위해, 혹은 지금으로써는 미완일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관점에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해한 각종 트랙들로 구성되어있다.
앞선 트랙들이 지향하는 공통의 소실점은 결국 질주를 거듭하는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 속으로 수렴한다. 스피드런은 기본적으로 최단 시간의 게임 클리어를 위한 것이지만, 오로지 그러한 의도만으로 가늠하기엔 질주의 과정에 너무도 많은 사족이 불필요하게 간섭하고 있다. 일단 영상의 내레이터부터, 스피드런을 중계하는 BJ와 전시에 부속된 특별공략 텍스트 일부를 읊는 익명의 남성과 여성까지 포함해 최소 3명이다. BJ가 게임의 진행과 병행하며 별다른 정보값 없는 중계를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내레이터들은 닌텐도 게임보이에서 시작해 게임 <쉔무>가 구현한 ‘절차적 생성’이라는 랜더링 방식, 각종 주변기기들, R.O.B의 눈, 2000년대 한국의 온라인 게임, 그 안에서 구현되는 다중적인 시점들, 트와이스 직캠, V앱(...)에 이르기까지 게임과 가상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엄밀히 말해 무언가 보고 있다기보다,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이 상연하는 질주의 궤적은 앞선 내레이션 트랙들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트랙’으로 구실한다. 그것은 텍스트의 각각의 구간이 발화하는 내용/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게임보이의 발전형으로, R.O.B의 눈의 연장선으로, 그 외의 모든 것으로 각기 다르게 혼선된 채 인식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1인칭 시점은 스피드 러너의 일사분란한 파쿠르Parkour를 통해 온갖 지형지물들 사이를 넘나들며 시선의 낙차를 조성하지만, 정작 관객은 이 모든 질주의 감각으로부터 차단된 채 단지 화면의 바깥 혹은 표면surface만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화면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앞서 언급했듯 텍스트의 각 구간들을 듣거나 읽으며 서사의 얼개를 가늠할 때뿐이다. 이를 방증하듯 “혹시 트와이스의 멋진 점이 뭔지 알아요?”라고 되묻는 구간부터 화면상에는 본격적으로 트와이스의 각종 짤방과 face swap 어플리케이션으로 합성한 이미지 등이 하이퍼스레딩 형식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1인칭 시점에는 도통 원근법적인 깊이감이 없거나 이를 자발적으로 무효화한다. 이런 식으로 표면을 쉽사리 뒤집는 방식은 지난 <유명한 무명>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Savior’가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이전 작인 ‘Soulseek/Pegging/Air-Twerking’ 위에 얄팍하게 투영된 것과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 ‘/Savior’는 감상해야 하는 영상작품이기보다는 그 제목처럼 화면 보호기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설치작업이나 작품을 보조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Savior’는 독립적인 영상 작품이기보다 <뉴 스킨>의 목재 구조물이나 <랠리>에서 텅 빈 커먼센터와 같은 역할에 가까워 보인다.”3) 그렇다면 강정석의 표면은 무엇을 ‘보호’하는가?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적 리얼리티)?
김희천의 ‘/Savior’는 마우스의 커서를 움직이면 금세 사라지고 말지만, 강정석의 표면은 그 너머로 질주하거나 몰입하기 위한 스피드러너의 관성과 그로부터 재차 밀어내는 표면 자체의 관성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이다. 그 결과 표면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트랙(의 절단면)으로 존재하며, 그럼에도 여타의 트랙들과 교차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의 하이퍼스레딩을 수렴할 수 있는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준다. <GAME Ⅰ>은 이와 같은 혼선을 유발하는 내레이션을 포함해, 사전에 텍스트로 정리하거나 구축한 특정한 사용자의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특별 공략을 비롯한 텍스트는 단순히 영상의 부록으로 구실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영상이 텍스트에 기반한 하나의 파본으로 제시된 것에 가깝다. 내레이터의 기계적 어조는 얼핏 불능감 이후에 도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예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한 나름의 촘촘한 서사적 얼개를 지니며 비약의 순간은 단지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현실로 이전되는 말미에 이르러서야 발생한다. 달리 말해 강정석이 스피드러너를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스테이지는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모호한 접경지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에 간섭하는 각종 트랙들과 하이퍼 이미지 및 링크들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에 굳이 현실을 기입하기 위한 엇나간 시도들이 빚어낸 파열이다.
이처럼 (세계관에 대한)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이라는 역전된 관계는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온전히 재현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게끔 한다. 오히려 명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불능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분신을 통해 시점의 탈착이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점차 현실감이 저하되고 있다(...)고 부추기는 공략 자체다. <GAME Ⅰ>에서의 속도감은 스피드러너의 질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는 특정한 사용자의 조급함에서 비롯한다. 이때의 사용자는 1인칭 시점이나 내레이터들과 등가의 존재가 아니라 정작 화면상에 부재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일련의 트랙들을 조급하게 조율해내고 있는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 ‘그’는 자신이 망상해낸 불능의 세계를 투사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불능의 세계를 최대한 실제의 불능감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능이라는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상태를 독자적인 세계관 속에서나마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든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은 스마트폰을 대하는 사용자의 관점과 흡사하다. 단순히 굳어있는 표면이 사용자의 헛손질에 의해 인터페이스로 변화하듯, <GAME Ⅰ>에서 제시하는 세계상은 특정한 사용자의 망상과 접촉함으로써 편의적으로 배열되는 와중에 있다. 특정 사용자는 전지적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굽어보고, 조급함 속에서 안도한다.
결과적으로 <GAME Ⅰ>의 관객은 앞선 전지적 사용자로부터 괴리된 채 ‘그’에 의해 조율되고 있는 관성들만이 존재하는 쿠소게4)에 가까운 공간 속에 처하고 만다. 스피드러너는 스테이지를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하기 위해 분주하지만, 계속 루프되는 영상은 정작 스테이지의 명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이로써 질주라는 행위는 표면을 가로지르기 위한 헛발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를테면 표면은 게임 맵을 통해 3d로 복각된 폐쇄회로로서 존재하고 불능감은 1인칭 시점을 경유해 화면 너머로 접속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간 내에서 공회전할 뿐 도통 해소되지 않는다. 기계 인간 혹은 온전한 아바타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도트와 폴리곤의 여하와 무관하게 언제나 표면에 의해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의 주변에 일렬로 비치된 스티로폼 박스들과 러닝머신의 발판이 향하고 있는 합성 이미지 속 도트들은 물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서로를 불완전하게 암시하며 동일한 불능의 자장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석이 유년 시절의 기억을 포함해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백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기계 인간을 자처함으로써 표면상에 최적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열화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게임적 리얼리티는 현실을 증강하기보다 사용자를 열화하면서 평형 상태를 모색한다. 혹은 스피드런이라는 질주의 궤적을 통해 열화된 자신을 백업할 수 있는 임의의 공간적 틀을 직조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분기한 평행세계
<시뮬레이팅 서피스A/B>를 포함해 강정석의 이전 작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동세대의 인물들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영상 혹은 시간이 열화된 클립들로 재구성된 채 유통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듯, 작가에 의해 주지된 무의미한 행동들(반복되는 출근길의 배웅, 고가도로 아래에서 콩알탄을 터뜨리며 주고받는 슬랩스틱, 오늘 하루 일과에 대한 자기고백 등등)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수행하며 자신의 잉여적인 정체성을 표면상에서 기꺼이 상연했다. 그러나 세대라는 사회학적 전제와 표면이라는 데이터 표상을 위한 시각적 인터페이스 사이의 교착 상태5)는 <GAME Ⅰ>에 이르러 얼마간 유보됐거나 본격적으로 (세계 내 주체와 대치되는) 표면 내 주체를 망상하기 위한 시도들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강정석은 동세대의 인물들을 표면상에서 굽어보는 대신 스스로를 백업시킴으로써 표면 내 주체 이를테면 ‘유닛’의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유닛’이 기꺼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상을 위한 토대를 가설하고 있는 셈이다.
동세대라는 전제가 그러했듯 표면의 관성에 의해 열화되기 이전의 주체는 여전히 유년기와 같은 실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계 내에서 육화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을 유닛 속에 기입하기 위해선 일단 기억이라는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얼개, 즉 게임적 리얼리티와 그와 관련된 불능감의 서사 및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또 다른 텍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후자는 결국 유닛으로서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불능감으로부터 연역된 일종의 대체 기억이다. 이처럼 강정석이 유닛의 세계를 위한 나름의 전사前史를 구축하기 위해 텍스트라는 형식을 구체적인 토대로 삼는 한편, 김희천은 지난 바벨 3부작을 통해 그저 인터페이스상에서 고스란히 복각했을 뿐인 ‘텅 빈’ 모델링의 세계 속에 이입하기 위한 장치로써 사소설에 가까운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사후적으로 투사해냈다. ‘루’라는 수신자에게 부치는 서신과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서사적 레이어들은 전사가 부재한 서울의 폐허들, 즉 반드시 철거됐거나 철거를 예비한 허름한 가건물이 아니더라도 CAD와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임포트되거나 GPS를 포함한 유닛들의 시점을 빌어 재조정될 수 있는 가변적이고 허약한 도시 구조체를 현실의 거울상으로 반영해내기 위한 텍스트적 질감이다. ‘이곳’은 기억을 백업하기 위해 모델링됐다기보다 내러티브가 투과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해진 데이터 껍데기다.
김희천이 ‘/Savior’를 통해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제 작업을 표면의 더께로 삼은 것은 사용자의 시선이 표면상에서 차단될 것이란 전제를 얼마간 의식함과 동시에, 3부작에 포함된 여타 작업들과 달리 별다른 내러티브가 부재한 ‘Soulseek/Pegging/Air-Twerking’을 오로지 데이터 껍데기들만이 범람하는 몰가치한 질료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Savior’는 작가가 습관적으로 촬영한 각종 스냅 영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파운틴 푸티지 조각들은 그것이 발췌한 실제 일상의 타임라인을 대변하며, 화면 보호기 이면에서 별다른 얼개 없이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데이터 껍데기들과 질료 차원에서의 대비값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랠리>에서 데이터와 혼선된 세계상을 은유하는 유리 파사드의 공간은 ‘/Savior’와 ‘S/P/A’의 시공이 대치하는 가상의 경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희천은 현실과 가상, (경계로서의) 파사드를 데이터에 의해 포화된 유사 디스토피아를 연출하기 위한 개별적인 전제들로 나름대로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현실의 패러미터는 파사드적인 공간 속으로 이접되기 위해 언제나 내러티브라는 자장 내에서 조절되어왔다. ‘/Savior’가 예외적인 이유는 그것이 데이터 껍데기와 별도의 영역에서 수집 나열됨으로써 내러티브와 함께, 조절 가능한 패러미터 자체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희천은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을 모색한다.
지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썰매>에 부여된 서사적 레이어들은 여전히 서사를 빙자하되 단순히 데이터 껍데기를 투과하기보다 공간의 폐쇄감을 북돋기 위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속도감의 방언을 터뜨린다. 중요한 것은 수신자를 향한 발화가 아니라, (작중에서 등장하는) VR기기를 뒤집어쓰고 서로의 데이터 자아를 ‘자살시켜주는’ 집단자살클럽처럼 데이터 차원에서 열화한 자아와 정보와 가십과 그것들 각각의 구분이 무화된 세계를 엄연한 현실로 인식한 상태에서 한층 배가되는 망상의 부피감이다. 달리 말해 한때 세기말의 정서와 대응되며 어쩐지 불길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파국의 정서는 <썰매>에 이르러 마침내 기정사실화된다. 앞선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은 결국 이처럼 파국적이고 뒤죽박죽인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모 레이싱 게임에서 빌려온 숭례문 서킷의 이미지는 레이싱카의 1인칭 시점이 숭례문 주변에 구획된 도로를 질주하며 점차 가속하고 이는 실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중력을 잃은 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굽이치는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의 1인칭 시점과 분할 화면을 통해 무한루핑되는 롤러코스터 장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암시되는 속도감은 강정석의 <GAME 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능을 전제하되, 이미 현실로부터 차단됐기 때문에 주어진 표면 너머에서의 자율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썰매>는 표면 너머로 신속히 미끄러지며 불능의 서사 및 내러티브를 헝클어뜨리는 이미지 잔상이다.
김희천은 <썰매>의 말미에서 face swap 어플을 통해 행인들의 얼굴 위에 덧씌운 자신의 얼굴을 빌어 화면 속에서 우리(가 속한 이편)를 응시한다. 이제 속도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자살을 거듭할 수 있는 ‘그’가 속해있는 세계가 단지 영상 클립의 일부, 즉 열화된 시간의 절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정석과 김희천은 표면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지금의 모호한 현실을 재고하고 있다. 전자가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사를 발판 삼아 자신이 조작하고 있는 불능의 세계가 투영된 표면을 향해 밀착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문학적 내러티브로 조형한 데이터 파사드 속에 이미 상주한 채 표면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냉소하고 있다. 이때 질주라는 행위는 각자가 점유한 세계관을 오작동시킴으로써 가시화하는 서로 다른 계기로 작용하되 관객의 시점에서는 동일하게 불능하다.
‘이상한’ 어둠 혹은 파국과 대면하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에서 주인공의 시선과 얼마간 밀착하여 심도가 흐릿해진 화면을 “항구적인 위급함의 감각, 언제나 다른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강제”를 수렴함으로써 작중 배경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잠식한 어둠 혹은 파국의 한가운데에 있기를 자처하는 “이미지-패닉”으로 정의한다.6) 그에 반해 스마트폰이나 게임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구현되는 휴먼 스케일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대상에 대한 심정적인 거리에 따라 화면 심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파국에 의해 추동되는 질주란 얼마만큼 ‘패닉’을 수반하는가? 이를 재고하기 위해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이라는 전제를 끌어와 각종 사회정치적 현안들에 무감한, 즉 패닉 없는 사용자 주체를 커스터마이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선 작업들에서 등장하는 질주라는 행위가 단순히 오래된 외상의 태엽을 감아 어딘가로 달려감으로써 파국의 감각을 활성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기입된 명시적인 계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도래한, 어찌됐든 ‘내’가 감수해야만 하는 정체모를 파국에 대한 나름의 윤곽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에 대한 위화감 혹은 유닛에 대한 불능감은 불현듯 당도한 세계를 대면하는 감각이다. 유닛의 시점에 이입함으로써 표면 내외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한순간의 냉소와 체념에 그치기보다 최소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파국의 범위 내에서 불능의 상태를 응시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유닛의 시점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단일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제는 유닛이 쳐다보는 방향성을 현실과 연루된 다중적인 세계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이 필요할 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유닛은 망상을 투영해냄으로써 유사 주체의 시점을 탈착한다. 이러한 유닛들이 산개한 세계는 파국의 계기가 없는 현재형의 파국을 각자의 서사로 대질해볼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비록 자아는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거나 편의적으로 백업할 수 있을 만큼 열화되진 않았지만, 유닛의 슬롯은 새로운 프로필과 그에 기반한 일종의 대체서사이자 독자적인 타임라인을 예비하고 있다. 나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패닉은 차라리 응시할 만한 대상을 계발하는 와중에 동원되는 서로 다른 밀도의 텍스트 사이의 낙차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전사前史들은 점차 ‘패닉’을 데이터적인 자기조형성의 과정으로 뒤섞는 동시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패러미터의 관계 내에서 굳이 어떤 서사적 얼개를 식별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유닛으로부터 비롯한 다수의 대체서사들을 서로 엮어냄으로써 파국의 불확실한 정체를 헤아리기보다, 서사성을 변화하는 스케일에 따라 재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재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혹은 일련의 작업들이 부러 파국의 계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 각자의 불능감을 통해 유지하는 소위 세계와의 등거리는 굳이 그 이면을 뒤집어볼 필요가 없는 지엽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달리 말해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세계를 압축/상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계된 각종 사회정치적 전제들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단순히 정치적 감수성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어쩌면 2008년 이후 한때 미술계를 포함해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동시대성의 전제가 와해되고 더불어 중산층이라는 신화가 대대적으로 붕괴함으로써 일련의 물적 토대를 잃어버린 주체들은 이제 자신의 현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매개를 주기적인 와해와 붕괴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적인 메커니즘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데이터의 권역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항구적인 위기감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계 내 주체는 결국 항구적인 위기 자체를 자양분으로 삼는 데이터 생산물에 자신을 투영해냄으로써 표면 내 주체로 적응해나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기계 인간이나 아바타가 아니라 굳이 표면이라는 전제를 부각하는 이유는 데이터에 대한 적응력을 발휘하는 순간마저도 여전히 불능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주변기기는 지금으로썬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데이터를 표상할 뿐인 표면상의 이미지를 쳐다보고 그와의 간극 속에 각자의 서사를 기입할 수 있을 뿐이다.
표면으로부터의 차단과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그 내외에 기입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주변풍경의 잔해들을, 무엇보다 자신의 잔해들을 에둘러보는 것. 이것이 지금 나에게 부속된, 그러나 얼마든지 다르게 번안될 수 있는 유닛의 전사다. 표면은 차단함으로써 불능감의 분기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다시 한 번,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1) 유닛은 본래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를 의미하지만, 나는 이를 GPS좌표와 게임의 캐릭터/아바타, SNS의 계정 등을 포함해 주체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가상의 객체를 의미하는 조어로 사용한다.
2) “(...) 네트워크를 통한 멀티플레이, 전자총을 이용한 사격, 레이싱 휠을 사용한 비디오 드라이빙, 유압식 모션 제어를 이용한 오토바이 경주, 시뮬레이션 체어, 센서를 이용한 제스처 기반 컨트롤러 등 오늘날 익숙한 플레이는 모두 초기 게임에서 선보여졌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충분히 가속되지 않아 다소 열화된 모습으로 도착한 결과물입니다.” 강정석, <특별공략, GAME Ⅰ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3) 이기원, <모델링, 화면보호기, 셀카_플러그인으로서의 김희천>, 「보고 쓰고 분류하기」, 2016, 89p
4) “일본에서는 '쿠소 게임(クソゲーム, 糞ゲーム)', 줄여서 '쿠소게(クソゲー, 糞ゲー)'라고 부른다.[1] '똥, 쓰레기, 젠장'이라는 뜻의 'くそ'와 게임을 합친 것. 북미권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Shitty Game'이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 그러나 강정석이 연출한 공간을 언급하며 사용한 ‘쿠소게’라는 표현은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졸작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능감을 암시하는 영상의 표면과 도트에 대응되는 각종 이미지들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현실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상태로 굳어버린 데이터 객체 혹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을 가리킨다.
5)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웹진 ‘집단오찬’(http://jipdanochan.com/71)
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리 옮김, 만일, 2016, 49-5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