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지른 물》 전시 전경 (사진: 윤병주)
합정동 인근의 갤러리, ‘레인보우 큐브 Rainbow Cube’는 가택을 고친 모양의 전시 공간이다. 이곳에선 작년 한 해 ‘처음의 개인전’이라는 작은 공모를 열었는데, 공모는 아직 개인전을 열어본 적 없는 이력의 작가에게 “처음의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공간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유지영은 2018년, 이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것은 작가가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관여한 첫 번째 전시였다. 개인전의 제목은 《엎지른 물 Spilled Water》이었는데, 전시 리플렛에 포함된 정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엎지른 물’의 경위란 다음과 같다:
“물과 컵. 물은 컵이라는 물리적 기반에 담겨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컵은 물이라는 내용물을 통해 사용가치를 얻는다. 그렇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물이 가득 담긴 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그 앞에 앉은 사용자가 목이 마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물은 사용자에 의해 들어 올려진 컵을 빠져나감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제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지반을 잃고 금방 증발될 위기에 처한다. 유용성에 종속되는 투명한 사물이었던 컵은 구멍이라는 비효용성을 통해 내용물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사용자를 좌절시킨다. 회화라는 컵에 담긴 이미지라는 물을 마시러 온 관객들에게, 전시 “엎지른 물”은 다음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경험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두 요소 간의 딜레마적인 관계를 상기시킨다.” 1
이 경위에는 맥락이 있다. 유지영은 물과 컵에 관련된 비유를 다른 곳에서 빌려왔는데, 그것은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파이코 베커스(Feiko Beckers)가 영국의 갤러리 텐더픽셀(Tenderpixel)에서 개최했던 전시인 <당신은 실제로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You might actually learn something>(2017)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 혹은 “워크샵”인 <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 A thing you can't, but also don't want: A workshop on handling frustration>(2017)이라는 작업에서 비롯한다. 작업은 “좌절감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해석을 담은 퍼포먼스”로, 해당 작업에서 파이코 베커스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컵과 거기 담긴 물을 앞에 두고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 어떻게 해야 해당 욕망을 좌절시키는 구멍이라는 방해물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읊조리다가 결국에는 구멍 난 컵(지지체)을 들어 올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물(내용물)을 다 쏟고야 마는” 장면을 연출했다. 2 유지영은 좌절감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이 퍼포먼스에서 영향 받아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이라는 작업을 제작했는데, 주제로부터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보단 퍼포먼스에 사용된 물리적 매개물로부터 작업의 계기를 얻은 듯 보인다. 이 컵과 물이라는 비유는 작업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등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되며 사용자와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과의 관계, 회화와 이미지와 지지체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했고, 작가의 첫 개인전 《엎지른 물》은 그 필요가 쌓이며 만들어낸 결과다.
유지영은 회화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 “상수로 여겨졌던 회화의 조건들을 각각 조정해보면서 도출되는 작업이 회화와 비-회화의 경계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가늠”하는 실험을 한다. 3 회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특정한 형태의 미적 미디엄에는 관습화된 문법이 존재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시작해 규칙을 임의로 분할하여 재배치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또 문법적 규칙이 그렇게 바뀌었을 때 어떤 경우가 회화로 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회화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지 양상을 실험한다. 만약 이 실험에 목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회화’라고 불리는 특정 형식의 기반에 대해 고찰하는 일일 것이다.
이 고찰에는 개인적 계기와 미적 계기가 공존할 듯하다. 작가는 회화 작업을 하며, 작업의 절차와 선택되는 재료와 같은 필수 요소들이 어째서 유독 한정되어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것은 일반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서는 성립되지 않는, 형식적 회화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작업의 절차를, 재료를, 나아가 기반을 바꾸기 위해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관찰 가능한 표본으로서) 주변에 대한 반발, 그리고 미적 차원에서는 (의심 없이 수용되는) 관습에 대한 반발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탄력인데, 이 반발력은 회화라는 미디엄에 연루된 다양한 이야기들, 문법적 규칙과 역사적 강제력과 관습적 이해와 물질적 층위 같은 수많은 요소의 가능성과 미래를 간과하지 않는 작가가 도출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허나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 유지영의 실험은 충분히 의아한 실험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회화의 기반을 고찰하고 탐구하기 위하여, 이런 절차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그러니까, 지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그냥 ‘그림을 그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역시 회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냥 그림을 그린다는 것일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 그리는 행위 자체에 회의가 내재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엎지른 물》의 경우처럼 회화에 대해 실험하는 미적 행위가 극적인 형태로 내보여져야 하는 필연성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종종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회화를 매개하는 것은 손에 익은 기술과 그 기술을 위해 적합하게 생산된 각종 재료를 이용해 캔버스 전면((前面) 혹은 바깥 어딘가에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법을 포함한다. 다만 이것은 회화적 매체/행위가 지니는 각종 속성을 개체화한 뒤 필연성을 지니도록 조작해서 재배열하는 행위 일체, 이와 같은 방식에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는 행위 일체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이것을 경향으로 특정할 수 있다면, ‘그리기’로 매개되는 회화와 ‘회화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통해 매개되는 회화는 서로 구분된다; 그에 따라 각자 다른 전제와 방법을 갖는다; 허나 이 구분은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에, 여러 차원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종종 뚜렷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엎지른 물》의 실험이 누군가에게 극적이라면, 그것은 작가가 ‘회화적인 것’ 안에 항상 포함되는 이 같은 혼란상을 어느 정도 의식한 결과다.
《엎지른 물》에서, 작가가 실험하는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에 따라 미적 실험의 표본처럼 보이는 어떤 파격적임이나 급진성과 같은 요소들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관찰에 기초해 문제를 인식한 뒤, 가설을 형성하고 검증한 다음 결과를 분석한다는 실험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에 따라 전시의 전제와 전제의 작동 방식, 또 작가가 최소한의 의도를 부여한 가시적/비가시적 관계들, 또 그중 무엇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 이와 같은 대개의 구성이 이해가 가능하도록 열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소형 동물의 인지 능력 실험을 위해 설계된 미로처럼, 뚜껑이 열려 조감이 가능한 형태를 갖는다. 전시를 바라보는 인간종은 어떤, 햄스터의 시점 같은 것을 통해 미로 구조를 탐구할 것인지 혹은 미로 전체를 위에서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거나 오갈 수 있다.
허나 어떤 시점을 통하든 공통되는 이해가 있다면, 전시에서는 (회화의)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이 관계 맺는 방법이 환유적 구조 안에서 틀지어지고, 이 과정에서 추상화된 정보 역시 일부분 해설된다는 점이다. 회화적 정보를 언어로 잠시 치환하여 그것이 갖는 다양한 벡터를 특정하는 설명은 작가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으로, 《엎지른 물》에서 물과 컵으로 설명된 회화 내부의 관계는 이전에 한번 포장지와 내용물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 적 있다. 4 물과 컵의 관계에서, 내용물 – 이미지는 갈증에 시달리는 누군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편 포장지와 포장 안 내용의 비유에서, 이미지는 내용을 보려는 누군가의 관심을 왜곡하는 것이다. 다만 두 비유가 갖는 유사점이 있다면, 회화 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미지의 시각적 힘이 대체로 강한 탓에 지지체 혹은 “물리적 기반”을 포함하는 이해가 실패한다는 평가다. 이미지의 힘이 이렇게 크다면, 이미지에 대한 단면적 감상을 넘어서는 이해를 위하여 작업에는 어떠한 공작이 수행될 필요가 있다. 이미지가 지지체라는 물리적 기반,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무대 위에서 지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나쁜 경우 새로운/다른 이해에 훼방을 놓는다면, 복잡하게 생각하기 전에 우선 강제력을 갖는 이미지의 대표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궁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 앞에 구멍 뚫린 컵을 가져다 놓는 회화적 스턴트를 시연한다. 사람들은 엎질러져 버리는 물과 함께 구멍 뚫린 텅 빈 컵을 손에 쥐게 된다. 아연함과 함께, 그 컵을 한 번 더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젤 회화’는 여태 몇 차례나 미적인 효용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캔버스 전면을 몸체로 사용하는 표면 중심의 회화, 이미지 위주의 회화가 온전히 극복되어 새로운 종류의 예술로 승화된 역사가 존재한다면, 회화의 감상에 있어 이미지 중심적 이해가 선행한다는 전제 역시 당위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엎지른 물》의 실험이 가리키는 방향 앞에는 어떤 방해물이 있는 셈이다. ‘특정한 사물(Specific Object)’의 논리가 미술을 새로운 범주로 확장하며 회화를 극복했다고 한다면, 이미지에 대한 《엎지른 물》의 전제는 다소 작위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때문이다. 허나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 시각적 평면으로서의 회화라는 영향을 재귀적 대상성(Recursive Objecthood)을 갖는 사물로 승화한 역사적 해석을 ‘회화’를 우회한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지영이 탐구하는 영역은 영생하는 이미지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에 의해 매개되려는 이미지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려는 회화가 표하는 어떤 끈질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끈질김은 사실 과거에 우회되었을 뿐이므로 여전히 존재하고, 그렇기에 극복을 위한 새로운 계기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계기는 보다 어려운 질문을 포함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회된’ 회화는 아직도 흥미로운 형식일 수 있을까? 이처럼 조각내어 그 근본을 다시 보아야 할 만큼, 회화는 여전히 흥미로운 형식으로 존재하는가? 회화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와는 상관없이, 회화는 꾸준한 수요를 갖는 형식으로 언제나 나름의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이것은 회화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보통 회화가 확장하는 미술 시장 안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장식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거쳐 해설된다. 허나 회화가 지니는 끈질김만큼은 급진주의 미학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매력적인 가치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점차 정형화되는 급진적 미술을 위해 회화의 이런 속성을 전유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중 관객의 강한 신뢰를 재료 삼아 주기적으로 환기되는 회화는 관객의 기대를 확보하기 용이하므로 ‘불편한’ 가치를 삼투할 수 있는 위장 작전의 껍데기로서도 유용하리라는 것이다. 5 이 같은 전략과 함께 회화는 갱신의 계기를 얻는다. 갱신된 회화의 문제는 캔버스 전면에 어떤 재료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화가 어떤 네트워크로 어떻게 편입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바뀐다. 회화는 이제 고정된 순환 구조 안에서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네트워크 안으로 외재화(Externalization)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 몸체는 추상화된다. 외재화 과정을 거쳐 개념적으로, 물질적으로 보다 넓은 공간으로 향하는 회화는 개체의 미학을 환경의 미학으로 확장하며 갱신된 가치를 확보한다. 6
이처럼 ‘확장된 회화(Extended Painting)’는, 이제 회화가 개별 미디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 작업 내부에서 다양화되는 미적 미디엄과 그 미디엄(들)이 물질적/비물질적으로 생성하는 관계 중 일부로 통합된다는 논리처럼 보인다. 회화가 관계하는 관습적 이해, 강한 신뢰, 나아가 회화적 언어 자체는 보다 넓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Condition)’ 안으로 편입된다 - 매체가 갖는 특정성이 무력해진 동시대 미술의 짧은 역사 안에서, 회화는 이처럼 갱신된 모델로 변모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회화 작업을 보며 내가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면, 그 작업들이 이와 같은 회화의 새로운, 확장된 모델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회화적인 것’을 널리
확장하는 방식으로 미술을 재정의하려 들기보단, 회화라는 미디엄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미술에 대해 탐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그 전제는 얼마간 의아하다. 현대/동시대 미술의 다종다양한 매체 탐구의 역사에 대해 인지한 누군가가, 회화를
신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회화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 설명할 때,
관련되어 쉽게 상기되는 주체는 얼굴 없는 대중관객이지 비판적 성격의 작가가 아니다. 회화는
죽었고 죽은 회화가 한 번 더 죽었다가, 그게 한 번 더 돌아왔지만 그것조차 허무하게 잊힌 것이 아니었는지? 회화는 오로지 흥미롭게 극복되는 장면의 재료로 쓰일 때 의미 있고, 대충
그렇지 않나요? 허나 한국의 몇몇 회화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를
하나의 중심으로 파악한 뒤 주변적인 것을 뒤섞어 무게 중심을 재편한다는 아이디어는 전혀 흥미로운 것이 아닌 듯 하다. 《엎지른 물》에 설정된 주요 가설인 ‘회화는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으로
나뉘어진다’는 주장 역시, 회화를 극복/반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수정해야 하는 무엇으로 간주한 결과로, 유지영은 회화가 기타 주변 요소들과 관계되며 다양한 미학적 논의 속으로 펼쳐지기보단 기존에 관계하던 관습적
이해를 탐구하고 “고장내어” 7 새로운
이해를 촉발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편으로는 아주 시대착오적인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선은 이와 같은 이해를 유도하기 위해 설정된 각종 조형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정체되고, 혹은 해결되는지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이때 비로소
햄스터-시점이 유용하다.
전시에서는 유사한 문법이 반복되며 장치가 된다. 팜플렛을 통해 작가가 직접 밝히는 일종의 안내문, ‘구멍 뚫린 컵’과 ‘엎질러진 물’이라는 비유는 여전히 비유이지만, 《엎지른 물》 안에서 예상보다 직설적이다. 이 구조는 작가가 회화를 어떻게 고장 낼 것인가 고심한 결과로, 구멍이 난 패널은 ‘컵’에 해당하는 물리적 기반의 형상물이며 바닥을 구르는 작은 패널이 바로 ‘물’에 해당하는 ‘이미지’에 상응하는 결과다. 구멍 난 패널은 같은 모양의 백색 패널을 쌍으로 갖고, 예의 패널로부터 직접 탈각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패널은 전시 공간 바닥 혹은 거치대 위에 나름의 질서를 만들며 놓이는데, 이것들로 레인보우큐브의 작은 공간은 제법 빈틈없이 채워진다.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16.1 x 50.6 / 16.1 x 50.6 / 23.8 x 22.5 / 23.8 x 22.5 / 26 x 18.6 / 26 x 23.4 / 26.2 x 47.5 / 66.6 x 24.5 / 73.3 x 51.4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43 x 43 cm)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작가가 설정한 비유의 구조는 언어 차원에서 마감되지 않고 작업에 슬며시 개입하여 몸통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는 시각적 흥미를 돋우는 일에도 쓰이며 전시의 의제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권유하는 일에 쓰이기도 하지만, 비유를 따라 형성된 모종의 서사는 각 패널 간의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좌절의 서식>과 <희망의 서식>의 경우, 비유는 스티커의 형태를 인용하며 형성되는데, 이 인용은 자연스레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게 그러니까, 어째서 하필 스티커일까?
《엎지른 물》 전시 중 <좌절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구멍이 뻥 뚫린 채 어려운 시간을 겪는 회화에게 예쁜 심상의 탈부착형 2차원 장식을 껍데기로 입혀버리는 것은 잔인한 선택처럼 보인다. 허나 여기에는 작품의 제목을 비롯,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좌절의 서식>, 그리고 <희망의 서식>이 전유한 레디메이드 사물인 스티커는 이미지를 ‘엎지르는데’ 최적화된 물건이다. 스티커에서, 이미지는 탈각되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미지가 빠져나간 뒤 스티커의 남은 몸체 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버려질 터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보면 스티커는 작가가 설명한 회화의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 간에 생겨나는 관계, ‘지지체는 이미지에 의해 가려진다’는 전제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두 작업의 경우, 제목은 전시명 《엎지른 물》과 마찬가지로 파이코 베커스의 퍼포먼스 <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좌절”도 “희망”도 특정한 감상적 정서와는 관계가 없고, 아이디어를 취한 작업의 인용이자 이미지에 의해 실패하는 지지체의 위치를 해설하는 단어로서 도구적이다: 비록 누군가는 좌절, 혹은 희망과 같은 정서를 이 구멍 난 패널 안에 대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좌절의 서식>과 <희망의 서식>, 또 이들로부터 빠져나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해 재단할 부분을 설정한 다음, 공방의 도움을 받아 패널을 커팅했다. 이후 커팅된 단면을 ‘사포질’ 해서 매끄럽게 만든 다음에는 패널에 캔버스 천을 씌우고 젯소를 발라 바탕을 준비하는 등, 패널이 회화로 기능할 수 있게끔 매개하는 후반 작업이 요구됐다. ‘서식’ 패널에서 탈각된 이미지-패널에도 역시 캔버스 천을 씌우는 등 바탕을 만드는 작업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파편화된 이미지 위에도 ‘oil on canvas’의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처리로, 작가가 회화의 기본적 구성 요소를 프레임, 표면, 안료로 (1차적으로) 정의함에 따라 대개의 작업에는 이 세 요소를 확보하기 위한 절차가 적용된다.
그렇다면 예의 두 작업이 회화를 스티커처럼 다루면서 이미지를 떼어냈을 때, 그 광경은 과연 전유한 물건의 경우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까? 이미지들이 잘 떼어져 바닥으로 향한 것을 본다면, 스티커-환유를 통한 예의 “고장”은 제법 성실하게 진행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지와 지지체, 양자가 회화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관계는 여전히 서로 밀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장이 발생한 현장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이미지-패널이 갖는 이미지는 원래의 형상을 추측하기 어렵게 블러(Blur) 처리되어있고, 몇몇 파편은 하얗게 탈색되어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지지체 위에 남겨진 이미지의 흔적은 훼손되지 않고 뚜렷하다. 이것은 분리된 파편이 지지체를 온전히 갖추면서 독립된 회화 개체로 전시되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하여 작가가 임의로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지체로부터 탈각되어 튀어나왔을 때 이미지가 처하게 되는 취약 상태를 표기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미지-파편은 탈각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벗겨지며, 지지체 위에는 구멍이 뚫려있지만, 아직 고장은 완전하지 않다.
《엎지른 물》 전시 전경, <좌절의 서식>과 <희망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Oil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9.8 x 31.6 / 11.1 x 15.8 / 12.9 x 15.5 / 12.9 x 15.5 / 13.2 x 28.8 / 13.3 x 43.5 / 16.2 x 16.2 / 18.1 x 8.1 / 22.4 x 22.4 / 26.7 x 26.7 / 31 x 19.6 / 31.2 x 16 / 31.7 x 28.7 / 36.4 x 19.9 / 36.4 x 19.9 / 36.4 x 19.9 / 38.1 x 38.1 / 67 x 67cm)
<좌절의 서식>과 <희망의 서식>의 구멍 뚫린 패널들, 그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패널이 일정량의 훼손을 주고받으며 멀어져 있는 동안, 구멍 뚫린 패널을 위한 쌍이자 지지체 차원의 네거티브처럼 보이는 패널은 곁에서 온전한 모습을 지니며 여유롭다. 이것은 어쩌면 ‘이미지-없는-순수-지지체’ 형식으로서 이미지를 입고 고생 중인 템플릿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형상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 온전한 뼈대 역시 예의 구멍 난 패널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근거가 사라지는 형식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불완전한 형식이다. 1차원적으로 독해하자면, 이것은 순수-지지체의 이상 역시 온전한 형태를 갖출 때조차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좌절’과 ‘희망’이 이와 같은 부침을 겪는 동안, 같은 공간에 전시된 다른 작업은 어떤 역경을 통과하고 있을까? 유사한 문법의 <Plate ⅩⅨⅩ.>, 그리고 <Plate Ⅷ.> 역시 나름의 고초에 시달린다. <좌절의 서식>에 설정된 비유적 구조가 스티커였다면, ‘Plate’의 경우는 도판을 껍데기로 갖는데, 그에 따라 작업의 질감 역시 달라진다. <좌절의 서식>에서 바탕을 만드는 초반 작업에 젯소가 사용된다면 ‘Plate’에선 아크릴 미디엄이 쓰였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패널에 도판의 질감과 같은 종이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 8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ⅩⅨⅩ.> 부분 (확대) (사진: 윤병주)
<좌절의 서식>과 <희망의 서식> 쌍과 ‘Plate’ 시리즈는 서로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흡사한 방법론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출된 이미지-패널을 살핀다면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좌절의 서식> 쌍의 경우 고장을 위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미지들은 흐려지고 표백되며 본래의 이미지를 잃지만, <플레이트>로부터 분리되는 이미지들은 원래의 형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허나 여전히 몇몇 이미지-패널은 공백이다.) 그뿐 아니라 독립된 작업으로 거듭나며 제목과 캡션 등을 얻는다. <좌절의 서식>의 경우에서 작가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분리된 개체로 제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선택은 그와 무척 대비된다.
<1-13 from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1 from Plate XIXX.: 8.7 x 15 cm
2 from Plate XIXX.: 9.3 x 16 cm
3 from Plate XIXX.: 13.3 x 14.5 cm
4 from Plate XIXX.: 14.4 x 16.8 cm
5 from Plate XIXX.: 17.3 x 19.9 cm
6 from Plate XIXX.: 21.1 x 19 cm
7 from Plate XIXX.: 21.1 x 23.5 cm
8 from Plate XIXX.: 18.4 x 22.5 cm
9 from Plate XIXX.: 19.8 x 25.2 cm
10 from Plate XIXX.: 25.3 x 22.7 cm
11 from Plate XIXX.: 25.4 x 23.7 cm
12 from Plate XIXX.: 24 x 26.6 cm
13 from Plate XIXX.: 29.2 x 35.7 cm
(사진: 윤병주)
이 선택은 어쩌면 도판이라는, ‘Plate’가 몸체 삼은 레디메이드 물건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스티커는 탈착을 위한 장식이지만 도판은 책의 일부로, 자립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설명적 기능을 지닌다. 스티커의 경우 우선되는 것은 항상 이미지이고, 몸체의 쓸모는 사소하다. 허나 도판에서, 이미지와 지지체 간 관계는 거의 불가분으로 동등하다. 스티커의 이미지는 그 몸체로부터 떼어졌을 때도 여전히 스티커로 존재할 수 있지만 도판의 이미지는 떼어지는 순간 맥락에서 이탈하며 기능을 잃는다. <좌절의 서식>의 이미지-파편들에겐 온전한 회화로 독립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이 스스로 섰을 때, 전시장에는 회화가 아니라, 크게 확장된 스티커 모형이 소환된다. 반면 도판은 이미지가 멀쩡한 채로 독립하더라도 상관 없다. 이미 특정한 책의 맥락으로부터 탈선한 이미지는 기능 자체가 변화한다. 유지영이 인용한 도판은 각각 『History of North American birds』(1874)와 『Eggs of North American Birds』(1890)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전자의 경우 미국의 조류학자이자 학예사였던 스펜서 풀러튼 베어드(Spencer Fullerton Baird, 1823-1887)가 로버트 리지웨이(Robert Ridgway, 1850-1929), 그리고 토마스 마요 브루어(Thomas Mayo Brewer, 1814-1880)과 함께 집필했으며, 후자는 마찬가지로 미국의 조류학자였던 찰스 존슨 메이너드(Charles Johnson Maynard, 1845-1929)가 집필했다.
<Plate VIII.>(2018), Acrylic paint and graphite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의 이미지-패널의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가 원래 갖는 모양을 반영하며 결정되고, 그 때문에 캔버스가 사각형 혹은 원형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형태를 갖는 캔버스 역시 ‘Plate’의 이미지들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사각/원형 캔버스가 역사적 형태의 회화를 상기시키며 일반화된다면, 도판 이미지에 조응하며 도출된 변형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와 특정적으로 결부되는 유일한 지지체 형식으로 승화된다. ‘Plate’에서 도판이라는 추상적 몸체는 이미지와 지지체가 형성하는 딜레마적 관계 안에 유화(乳化) 작용을 일으키며 예외적인 독립성을 만들어내는데, 《엎지른 물》의 실험에서 의외의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처럼 구멍 뚫린 패널 본체와 파편화된 이미지 패널이 필연적 과정을 거쳐 분절될 때 파생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화 전면과 그 물리적 지지체가 특정적으로 대응하며 형성되는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 형식은 ‘회화-조각’이라 명명할 수 있을 법한 부류의 형식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회화-조각’이 회화적 관습을 차용, 불분명한 입체적 영역과 연관되며 확장을 꾀한다면 변형 캔버스는 여전히 회화의 역사와 관련되어야만 이해가 수월한 형식 중 하나다. 유지영이 이미지-패널 위에도 캔버스 천을 붙이고 유화 물감을 올려 ‘oil on canvas’를 부여하며 수행적 관계를 설정할 때, 이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회화를 위한 실험이라는 전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엎지른 물>의 이와 같은 경위는 단일한 목적을 위해 명료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전시의 방법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고, 또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한 모종의 해설과 모종의 주석을 요구할 수도 있다. 패널 위에 존재하는 공백, 또 그 공백의 원인이자 결과인 파편들, 그들이 왜 그런 모양으로 ‘엎질러졌는지’, 또 만약 그런 모양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어떤 실험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미 지나친 전시장의 초입, 그 근처에 기대 서 있는 하나의 작업이 그런 주석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작업의 제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인데, 제목에서 분명하듯 작업은 혹이 난 프레임과 구멍이 난 캔버스를 즉각적인 대조가 가능하도록 병치한 형태를 갖는다. 프레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프레임과 캔버스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캔버스의 모습은 간단한 고장을 실험한 결과물인데, 혹(+)과 구멍(-)은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지만 프레임과 캔버스에게 각각의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지지체 대상의 고장을 성공시킨다.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 Jesmonite and primed canvas, oil paint, Dimensions variable (each 40 x 30 x 2 cm) (사진: 윤병주)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를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ⅩⅨⅩ.>와 <Plate Ⅷ.>의 양상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해석은 임의적이고 부분적이다. 허나 전시를 구경하는 방법은 언제나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더 뻔뻔하게 전시를 한 번 더 돌아보자면, <좌절/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시리즈 등 《엎지른 물》의 작업들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 시도된 간단한 고장에 한 가지 명령어를 더해 복잡화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 명령어란 당연히 이미지일 텐데, 이처럼 이미지가 개입되자 상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처럼 깔끔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작업에서 어느 정도 성취된 듯 보였던 ‘구멍 내기를 통한 고장’의 문법은 이렇기에 확장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은 여전히 다 소진되지 못해서, 이미 얼마간 완성된 방법론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전시에서, (이미지에 대한) 고장-실험이 신경계를 교란하는 망막적 실험이 아니라 형식적 실험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재미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리기’는 회화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굉장히 중립적인 태도로 다루어낸다. 유지영은 이미지를 꽤 섬세하게 조형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통해 어떤 것도 담아내지 않겠다는 목표를 위해서이다. 전시에 사용되는 회화적 이미지는 무척 다양하다; 어떤 화면은 구상적이며 어떤 화면은 비구상적이고, 어떤 화면은 백색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 이 다양한 구성은 특정성을 매개하지 못하고 같은 차원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모종의 중립적 대표성을 부여 받는 이미지와, 그에 의해 창출되는 시각적 건조함은 ‘구멍 내어 고장 낸다’라는 목표에 단순성과 합리성을 실어준다.
그렇지만 회화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꽤 과격한 행위임이 틀림 없다. 구멍은 물리적인 공백을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상징적인 공백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젤 회화’의 캔버스 전면은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면으로서 대표하는 것이 많았다. 회화에 구멍을 뚫는 일에 대해 상상할 때, 표현을 위한 과격한 정동을 실어 나르는 힘센 붓질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것과 크게 거리를 두려는 합리적 단순성의 공백은 전시의 목적과 전개가 도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에 대해 알리는데, 이것은 스타일일 수도 있고 (작가적) 기질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고요하며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식의 개입으로도 망가뜨리는 일에 대해 다룰 수 있을 만큼, 회화 매체는 긴장된 상태다. 긴장의 원인은 촘촘하게 짜인 관습적 이해의 추상적 물리력으로, 회화가 이런 긴장을 유효하게 받아들일 때, <혹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망가뜨리는 단순한 조작 역시 잠시 유효해진다.
유지영이 수행하는 고장은 실험적 절차를 거치기에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한편 이 실험이 전제하는 주요 가설은 검증이 어려울 만큼 유동적인 영역에서 창안된다. 이를테면 이미지가 지지체와의 갈등에서 대개 승리한다는 전제, 프레임과 표면과 안료가 회화의 기본 구성 요소라는 전제, 또 회화적 이해가 이미지와 지지체로 양분된다는 전제 등이 그렇다. 들여다보면, 이 가설은 실험 대상의 근본적인 정의에 개입하는 급진적 가설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해 ‘회화적인 것’이라는 추상적 미디엄의 몸체를 필연적으로 조작한다 - 원활한 고장을 위해, 원본을 고장에 적합한 상태로 개조한다.
회화의 유행이라는 아리송한 사태 앞에는 동시대 미술 문법의 붕괴가 선행한다. ‘동시대 미술은 특정적인 것을 상실하고, 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것의 추상화 단계를 거쳤다’라는 가설이 가능하다면, 회화를 하나의 사물로 파악하는 이해는 흥미롭다. 회화는 가장 추상적일 때조차 사물성을 구현하고 고착화된 물질적 문법을 통해 구성되므로, 재편되기 시작한 미술의 의제들에 대해 단단한 형태로 반응하기 수월하다. 예의 ‘개조’란 사실 이에 대한 각주가 된다. 회화는 관습적 이해의 구습에 의존하는 특정한 미학적 규칙이지만, 그 규칙을 담보하는 역사/미술사는 여전히 관습적 이해를 생산하되, 위계를 생성하지는 못한다. 역사는 이제 이미지 차원에서 블랙박스화되어 굉장히 평등한 방식으로 수집되는 것이므로, 이 평등/평면의 시간축 위에서 개인이 의도를 가지고 조형한 미시적 시점은 잘 정렬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축적된 관습의 그것에 상응하는 무게를 얻을 수 있다.
회화를 단일한 중심으로 간주한 채 주변적인 것을 경유해 확장을 꾀하는 작업은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끝을 선고받았던 그때부터, 쉽게 낙차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용했다. 허나 이제 역사/미술사는 위계를 생성하지 않고, 회화 역시 단일한 경향이라고 단순하게 특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회화는 모더니스트 매체의 상징으로 간주되며 급진성을 물신화하는 상품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에 자주 시달리지만, 시장을 관찰한다면 이 같은 비판이 거의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까운 사례로,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유영국이 오윤, 임옥상과 뒤섞이다가 요시토모 나라와까지 관련되어버리는 서울 옥션의 경매장[을 전경으로 둔다면, 한국의 젊은 회화 작가들의 작업이 모더니스트 매체가 물신화되는 현상에 대해 다른 많은 (역사적) 회화들과 같은 책임을 지닌다는 비판은 불공평하게 보인다. 9
<310-756 from Plate V. and VIII.>(2018), Acrylic paint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428 from Plate V.: 9.1 x 14.6 cm
560 from Plate V.: 6 x 10.2 cm
756 from Plate VIII.: 13 x 20.7 cm
705 from Plate VIII.: 15 x 22.8 cm
510 from Plate VIII.: 15 x 23.2 cm
501 from Plate VIII.: 17.5 x 25.1 cm
513 from Plate VIII.: 16.4 x 27 cm
310 from Plate VIII.: 42.2 x 56.7 cm
(사진: 윤병주)
- 전시 서문, 「작가노트_구멍 난 컵과 엎질러진 물」.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70p. 작업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설명을 참조했다. 링크: https://indd.adobe.com/view/005ec962-af77-414d-94de-0f089119fa90 [본문으로]
-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5p. 위 링크. [본문으로]
-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8p. “회화가 선물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미지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와 같다면 그 표면 아래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가 내겐 더 중요하다.” 위 링크. [본문으로]
- Thomas Lawson, 「Last Exit: Painting」, 『Artform』(October 1981) [본문으로]
-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Fall 2009) [본문으로]
-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발췌. 작가는 《엎지른 물》에 설정된 몇몇 장치들이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음을 뚜렷이 한다. “(…) 도구로서의 투명성을 사물로서의 불투명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자가 회화에서 기대하는 ‘화면’이라는 유용성을 불능하도록 만드는 무언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화면의 물리적 공백은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 이때 사용된 미디엄은 골든(Golden)사의 파스텔 그라운드(Pastel Ground)다.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참조. [본문으로]
- 제 150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목록 참조. 링크: https://www.seoulauction.com/saleDetail?view_id=RESULT_AUCTION&sale_no=45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