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roject/[저기-거기-접때-나중에]

《호버링 Hovering》스케치 - 폐허의 유령이 실은 오늘의 슬기로운 젊음

호버링 Hovering스케치 - 폐허의 유령이 실은 오늘의 슬기로운 젊음


황재민

 

2009년 열렸던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세대적인 것The Generational'이었다. 로렌 코넬Lauren Cornell과 로라 홉트먼Laura Hoptman, 그리고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기획을 맡았던 이 트리엔날레의 이름은 예수보다 젊은Younger Than Jesus으로,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인 33세 아래의 나이로 한정된 작가들이 총 50명 참여했다. 이 전시에 설정된 유일한 조건이 단적으로 표현하듯,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젊음, 그리고 그 젊음을 바탕으로 한 범주로서의 세대였다. 현대적 미술을 인양해온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젊음은, 이 트리엔날레를 통하여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되어 그것이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움을 구현한다.

 

젊음이 전시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축이었던 만큼, 전시에서 다루는 세대적인 것이란 세대라는 개념을 폭넓게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젊은) 세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세대란 2009년 당시의 청년 세대, “밀레니얼Millennials"이라고 지칭된 세대를 말한다. 젊음이 현대적 미술이 갱신해온 현재를 지칭하는 하나의 요소라면, 그 젊음의 구체적인 내용인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랜 선에 매개되어 세계화된 세상으로부터 나고 자란, 의인화된 새로움이 되어 나타난다. 전시의 콘셉트에 맞추어 보자면, 그들이 가지는 새로움은 세계화된 지구촌Global village’이 갖는 새로움과 동등한 셈이고, 이들을 조망하는 것은 결국 세계를 관찰하는 것 - 어떤 세계관이 아니라 정말로 지구촌을 관찰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누군가 꿈꾸고 믿었던 유토피아적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를 앞에 두고, 전시는 젊음을 채집하는 일로 하나의 세계상을 표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보다 젊은이 포섭한, 25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군은 미지의 새로움으로 이동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 표현된다.1) 젊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세대를 빌어, 젊음과 새로움은 이렇게 연관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이 내포하는 의미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확실히 밀레니얼은 전지구화와 디지털 기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첨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밀레니얼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경제 위기와 기대감소의 시대에 따르는 시대적 정서이다. 밀레니얼은 축소된 욕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나아가 축소된 경험에 대해서 익숙하다. 그러므로 밀레니얼은 더 이상 발 디딜 바깥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또한 익숙하다. 전지구적 젊음의 특징은 불행하게도 전지구적 경제 위기에 근원하는 전지구적 가난과, 전지구화된 공간 아래 통합된 지역성이 선사하는 마이너스-경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보다 젊다는 사실이 지칭하는 것 중 특정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서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삭제되어야 한다. 젊음에게는 신성함이 없고, 가능성에게는 한계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이 이제 젊음은, 바깥은,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다면, 그 모양은 무엇과 같을까? 한국의 서울의 영등포의 2/W에서 개최된 전시 호버링Hovering이 제시하는 화두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런 문제들과 맞닿는다.

 

<호버링Hovering> 전시 포스터(http://www.90apt.com/hovering.html)

 

평론가 권시우와 90APTNNK(윤태웅)가 기획하고 김동용, 김효재, 류수연, 서민우, 오연진, 전예진, 정완호, 지호인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호버링은 기획자와 작가 뿐 아니라 전시 리플렛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부터 음향 테크니션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모든 참여자가 90년대 출생자로 이루어진, 예외적인 구성의 전시였다. 그러나 호버링이 전시 경험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 파릇파릇한 것,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 아니라 마이너스-경험으로부터 비롯하는 마이너스-세계상을 근간으로, 주어진 공간과 형태에서 적절히 작동하는 무엇을 어떻게 적절히 펼쳐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는 청춘의 끓는 피가 자아내는 흥분이나 신선함이 거할 자리에 맥빠짐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자리를 잡는다. 나아가 호버링에서 제약은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전시에 따르면, 오늘의 젊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이 신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적 폐허라는 제약을 겪을 뿐 아니라 또한 (보통 80년생이 주도한 미적 경향이라고 통용되는) ‘신생 공간이 동일한 난관을 맞아 사용했던 폐허 대상의 전략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과거의 성취가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상황은 여전히 같기 때문에, 호버링하는 90년생 미술가들과 신생 공간했던 80년생 미술가들의 관계는 묘연하다. 80년생이 맞닥뜨리고 고생했던 문제가 90년생에게도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때, 90년생 미술가들은 근과거와 강제로 단절된다. 비로소 이것은 맨 땅, 좀 더 고색창연하고 좀 더 어울리는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폐허이다. 폐허를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호버링, 좀 더 잘 움직이기 위하여 폐허에 어울릴 만한 존재 형태를 창작한다.

 

“(...)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재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 (이들은) ‘이전의 플레이어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채 아직 정주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하기 시작한다.”2)

 

젊음이 유령이 될 때, 젊음은 삶의 생동감을 포기하고 죽음의 고요한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저승의 존재로서, 유령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놀래주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포착을 비껴간다. 폐허와 잘 어울리는 유령 시점의 비유는 나아가 전시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주제 혹은 방법론으로 확장 되는데, 이 비유와 얽혀 정당화되는 것은 레이어링Layering"이라는 기획의 형태이다. 호버링에서, 각각의 작업들은 2/W 건물의 1층과 4층을 오가며 뒤섞이고 층 내부적으로도 선형적 관람이 어렵도록 하나의 풍경으로 엮인 모습으로 연출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문에서 유령 서버라 명명된 여러 겹의 폐허, 분별하자면 전시 공간으로서 2/W가 지니고 있는 외적 형태와 그에 얽혀있는 하나의 시간으로서 공간 커먼센터라는 폐허, 또 폐허에 가까운 비전형적 공간을 미술-전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자조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전 세대와는 차별되는, 유의미한 모양의 미학적 시공간을 펼쳐냈던 신생 공간의 전략, 또 이렇게 겹쳐지되 겹쳐지지 않는 근과거를 벗어날 수 없는 배경으로 두는 지금과 그 지금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플레이어의 오늘 - 어디로 가든지 폐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 이 다층적으로 겹쳐지는, 폐허-폐허-폐허-폐허의 공간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시 형태처럼 보인다. 이런 반응의 결과,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레이어링되는 전시 연출은 개별성과 총체성을 오가며 합선되는 한 편 작가 간 협업 구조를 활성화하며 유령 시점의 자유도라는 가설적 표현을 실제 공간 위로 구현해낸다. 더하여, 공간을 무대 삼아 작업을 레이어링하는 전략은 기획을 맡은 평론가 권시우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권시우는 계간 시청각의 지면을 통하여 압축과 팽창(CO/EX), 그리고 김동희의 작업을 엮어 해설하며 공간 인터페이스라는 임의적인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권시우가 제시한 개념어인 공간 인터페이스란 애플의 매킨토시가 스크린 내부의 공간에 데스크톱 메타포를 설정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운용을 원활하게 했듯이, 몇몇 작가들이 디지털 환경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작업 매체와 공간3)을 오늘의 시각성에 맞추어 소화하기 위하여 미술 작업이 놓이는 공간을 마치 데스크톱 위에 아이콘과 중첩 윈도우를 배열하듯 다루는 상황을 해설하기 위하여 동원한 개념이다. 호버링에서 78개에 달하는 작업들이 서로 겹쳐지고 멀어지며 공간을 빼곡하게 점유할 때, 전시의 공간 인터페이스는 클릭, 드래그, 나아가 터치에 이르는 사용자의 능동적 인터랙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도록 제어하며 관람을 굴절하는 효과를 낸다. 어쩌면 이것은 레이어링의 또 다른 쓸모가 되는데, 호버링이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서로 겹쳐내면서 전시를 볼만한 것으로 연출할 때, 그것은 또한 (‘볼만한 것이라는) 최소한의 성취를 위하여 작동하지만, 그와 함께 선형적인 관람을 망가뜨리면서 내부적으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블랙박스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선점한다. 그에 따라, 전시의 관람자 혹은 사용자는 전시를 자세히 살필수록 그것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를 보기 위해 2/W에 입장한 관객이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오연진의 그리드다. 48개의 액자와 그에 각각 담긴 이미지로 이루어진 오연진의 <Trade-off>는 서로 거의 유사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노출값을 조정하며 반복한 뒤 그 변화된 양상을 늘어놓은 작업이다. <Trade-off>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인화되어 있는데, 미디엄 자체가 아날로그 흑백 사진의 인쇄에 자주 쓰이는 만큼 관객은 작업을 첫 대면한 뒤 자연스럽게 이것을 사진으로 살펴보게끔 된다. 그러나 인화되어 있는 이미지는 명확하게 인식 가능한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패턴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화소값 이상으로 확대되어 불균질한 시각적 질감을 나타내므로 <Trade-off>는 디지털 이미지를 인화한 것인지, 혹은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연출한 사진인지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만약 이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라면, 그 광경은 한때 아날로그 현실의 재현에 쓰였던 프린트를 디지털 이미지를 담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포섭한다는, 관습적인 재매개 개념의 이해를 유희하는 셈이다. 작가가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대립적 관계의 요소들이 이루는 균형을 뜻하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는 제목으로 작업에 비유적 관계를 설정할 때, 그것은 노출값과 (이미지의) 정보값 간의 균형, 노출값이 조정될수록 백색 혹은 흑색으로 희미해지는 형상의 정보값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이 비유는 또한 현실을 매개하는 두 가지 요소로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를 포괄한 채, 노출값과 정보값을 조정하는 것으로 두 매개체 간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작업적 구조를 짜 보여줌으로 디지털-리얼리티와 아날로그-리얼리티가 서로 충돌 혹은 절충하며 현실과 관계하는 새로운 조건을 표면을 통하여 시뮬레이션한다. <Trade-off>를 첫 번째 프린트부터 시작하여 선형적으로 읽는다면, 하나의 유사-형상적 추상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반복되며 특정한 설정을 조정할 때, 흑색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재현적 사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포스트-디지털 조건 하에서 새로이 작동하는 혼합 현실의 시뮬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과다노출 되어 백색으로 희미해진다.

 

그 뒤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이 마주칠 만한 작업은 아마도 지호인의 회화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5>일 것이다.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은 보통 작은 체리 형상이 군데군데 반복되어 프린트된 데님을 캔버스 천 대신 삼은 뒤 표백제를 물감처럼 원단 위로 올려내고, 또 그 위에 붓질의 존재감이 드러나도록 희거나 검은 젯소를 몇 획에 걸쳐 수차례 바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때 작업은 데님 서포트(표백제)-체리 프린트-젯소 순으로 구분되는 개별 재료의 서로 다른 층위를 침범하거나 배제하면서 레이어 구조를 형성한다. 이 레이어 구조에 있어 표백제의 사용은 흥미로운데, 재료는 서포트에 개입하지만 적층되는 바 없이 서포트로 직접 스며들지만, 붓질이라는 조형적 단위를 참조하므로 데님 서포트에 온전히 융합되지는 않는다. 지호인의 회화는 20cm 남짓의 작은 크기로 제한되고, 나아가 이모지Emoji 같은 체리 형상이 주요하게 쓰이므로 결과물은 대개 화사하고 귀염성 있다. 지호인은 2/W의 폐허-폐허-폐허-유령 서버의 공간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회화적 레이어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폐허라는 전시 공간의 물리적 배경을 포섭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에서는 회화 측면의 색채를 공간 배경의 색과 조응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연작에서는 작업 뒤편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PVC 비닐 캔버스를 이용, 폐허로 호명된 전시 공간을 서포트의 일종으로 적극 전용하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호버링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무대 장치 삼아 작업을 전시하고 포섭하는 이상한 전시이므로, 지호인의 이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공간에 대하여 장식성을 띄게 된다. 그 때문에 만약 관객이 지호인의 회화를 신경 쓰지 않고자 결정한다면, 그의 회화는 이 전시 연출 내에서 가장 희미한 작업으로 남을 것이다. 허나 한 편으로 지호인의 이런 장식성은 또 다른 성질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회화를 2/W1층과 4, 나아가 두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 통로에까지 넓게 퍼뜨려 걸고 이때 장식성은 또한 편재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누군가가 지호인의 작업이 전부 삭제된 호버링을 관람한다면 누군가는 지호인의 작업이 전시 공간 전반에 넓게 걸쳐 기능하는 호버링을 관람할 테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존재하는 독립적인 채널을 레이어링-공간에 펼쳐냄으로써 호버링을 일종의 개인전으로 남용하는 셈이다.


지호인의 회화는 무척 의도적인 설치의 결과물이자 작업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론 또한 섬세한데, 이를테면 1층 군데군데 흩뜨려진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 중, 데님 서포트-젯소-체리 프린트 위로 백색 젯소를 붓질이 드러나는 올-오버 화면으로 칠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검정색 젯소를 같은 방식으로 칠한 4층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과 짝을 이루는 작업으로, 작가는 이 두 작업을 1층과 4층에 떨어뜨려 거는 것으로 두 공간을 연결한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여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이 20x20cm로 동일한 크기를 갖는 것에 비해 24.2x24.2cm의 크기로 비교적 큰데,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또 다른 연작 중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의 크기가 마침 24.2x24.2cm의 크기이므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과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연결하는 역할 또한 도맡는 셈이다. 보통 화면 구성이 조촐하되 난리법석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의 성격과는 차별되는, 단일한 두 색의 올-오버 화면을 가장 바깥의 레이어로 배치함으로써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회화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려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작업은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18개에 달하는 페인팅을 이리 저리 섞어 연결하는, 어떤 의미에서의 하이퍼링크 혹은 가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한편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작업 중 가장 과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은 1층에 걸린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인데, 관객의 눈높이 윗 편으로 올라가도록 높게 놓인 이 작업은 전시된 작가의 작업 중 유일하게 측면의 길이가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또 캡션이 캔버스가 아니라 혼합매체로 표기된 예외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회화적 물체가 아닌, 어떤 다른 혼합된 것으로 공표하는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1층 공간 전반을 성상적 시점에서 조망하여 전시 전체를 장식 차원에서 매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화사한 형광 핑크의 몸체로 표상한다. 지호인이 호버링에서 개인적 채널을 설치한 뒤 얻어내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 최적화된 매체라고 여겨지는 회화를 폐허의 조건에 얽어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인데, 작가는 이런 배치를 통하여 하나의 이미지-표면으로서의 회화가 현재 가질 수 있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폐허를 정면으로 마주본 상태에서 재검토한다.

 

이어지는 김효재의 <난 마돌 : (Nan madol : season 1,2017)>(이하 <난 마돌: >)은 진공관 형태의 유사 인큐베이터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 중인 세 점의 작은 '유물' 연작과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포스트-시네마로서 <난 마돌: >은 디지털-‘평평한지금을 적도 부근 미크로네시아에 현존하는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해상 유적에 비유하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서사 속에서, 근과거의 문화적 생산물과 역사적 기록 따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하여 고해상도로 복원되고, 오늘의 시점에 이국적 현상으로 재생산되고 재배치되어 오늘에 적합한 오늘의 창작력을 소진시킨다는 미학적 문제는 혼합적 시공간에 근거하며 종종 현재의 시간에 침투하는, 가상적 유물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영상의 설명에 따르면,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이 유물은 보통 납작하고 반짝이는 파일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유물들은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올드미디어화한, 뉴 미디어 디바이스에게 가장 잘 포착된다. 구세대 핸드폰, 전자사전, 영상 재생이 가능한 MP3, CRT 모니터와 오래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난 마돌연작에서 이 디바이스의 종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관객은 4층에 위치한 <난 마돌: (Nan madol : season 2, 2017)>(이하 <난 마돌: >)를 이 디바이스들을 통하여 관람할 수 있다. 호버링에 전시된 난 마돌연작의 경우, <난 마돌: >이 비교적 선형적이고 그래서 설정한 서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상영된다면, 4층의 <난 마돌: >는 서사 진행을 파악할 수 없도록 조각조각 편집된 영상이 나열되는 방식으로 상영된다. 반면 난 마돌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관람이 가능한 <[JW J 후기] 난 마돌 다큐멘터리 시리즈 6분만에 보기>(이하 <난 마돌 후기>)는 개 중 서사 진행을 따라가기가 가장 수월한데, 이 영상을 통하여 김효재는 이전의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던 특정한 사실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설하고, 그를 통하여 이전의 두 작업을 포괄하며 마무리 짓는 역할을 부여한다. ‘난 마돌연작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각각의 영상이 각자 다른 형식으로 상영되며 서로 다른 형식적 벡터에 근거한다는 점인데, 김효재는 이 벡터를 <난 마돌: >-<난 마돌: >-<난 마돌 후기>로 이어지는 선형적 관계 안에 배치하며 서로 다른 작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보증하고 보충할 수 있게끔 늘어놓는다. 이 중에서도 <난 마돌 후기>의 쓸모는 중요한데, 유튜브 리뷰 영상의 통상적인 형식을 본따 가져온 <난 마돌 후기>는 점차 한국인의 외재화된 정신으로 변모하고 있는 유튜브 플랫폼의 한 조각으로 변모하여 난 마돌연작을 새로운 층위에서 조망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어 유튜브 플랫폼은 가짜 뉴스와 연예인 가십 등 검증되지 않은 저해상도의 정보를 자막의 형태로 정리한 뒤 무의미한 배경음악, 그리고 짤방및 스크린 샷 이미지 등과 함께 송출하는 특징적 형태의 영상 정보가 마구 나도는, 이상한 포털로 변모하는 중인데, <난 마돌 후기>는 이 플랫폼의 일부로 숨어듦으로 이렇게 다중 생산되는 영상 형태의 허구적 리얼리티 혹은 리얼리티적 허구를 모방하고, ‘난 마돌연작에 지시성을 가설한다.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작가는 난 마돌이 물리적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서사 내에서 난 마돌이라는 가상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미래라는 과거의 동력을 잃어버린 미술이 (근과거에 의하여 침범되는) 오늘날 의미를 갖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호버링에서 작가는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를 유물이라 명명하고 파편으로 잘라 소환해내는데, ‘유물연작으로 표기된 이 작업들은 증명사진 크기의 작은 사진이 되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이 모양은 우습기도 괴상하기도 불쌍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기가 조촐하고 작아 진공관에 담겨있지 않는다면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한다. <난 마돌 후기>에서, 3자 시점의 화자는 난 마돌시리즈의 매력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꼽는다. 특정 이미지 및 영상을 인용하는 유튜브 영상은 보통 저작권 침해 사례로 판단되어 금방 삭제되곤 하지만, ‘난 마돌시리즈는 어떤 이유에선지 끝까지 유튜브에 잔존하고 있는 일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정보가 수없이 업로드 되었다가 수없이 사라지곤 하는 디지털 생태계의 임시적인 성격은 거기-있음이라는 현실의 근원적 속성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치한다. 어쩌면 난 마돌연작이 꾸준히 거기-있을수 있는 이유는, ‘난 마돌이 오늘날 가능할 수 있는 오늘의 형태를 역방향에서부터 되짚어나가 재구축하고자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과물로서 구축된 오늘은 이전의 오늘이 아닐 테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예외적 현상으로 표시되고 작가가 시뮬레이션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이 사라지지 않음은 관람의 중요한 동인으로 위치한다.

 

류수연의 작업은 손 드로잉에서 리소 프린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가 느슨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레이어링을 전시 구성의 방법론으로 채택함에 따라 공간 곳곳으로 산개하는 여타 작업들과 비하자면 류수연의 작업은 비교적 덩어리져있고, 선형적으로 읽힌다. 이처럼 전시의 큰 맥락이 되는 레이어링이 서로 다른 값을 지니는 층위를 합치고 포개는 방법론일 뿐 아니라 합치고 포개어 연결시키는 방법이라고 볼 때 류수연의 작업은 그 연결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으로, 관계를 도형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작업은 주제를 소실점 삼아 다양한 인상으로 벌어지되 서로 비가시적인 연관 관계를 형성하며 겹쳐진다. 항시 혼란한 호버링의 전시장에서 한 가지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또한 독립적인 채널을 형성하고 운용하는 일이 되지만, 1층 전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매스가 있는 작업은 다른 입체들과 겹쳐지게 되어있으므로; 류수연의 작업 또한 겹침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1층에 위치한 류수연의 작업 중 <첫인상>은 천장에서 시작해 바닥까지 늘어진 긴 천 위에 원 도형을 반복하여 프린트한 작업인데, <첫인상>이 구석을 장악하며 뒤편을 가려낼 때 그것은 김동용이 설치한 작은 앰프를 효과적으로 숨기는 역할을 하면서 전시 디스플레이 상에서의 또 다른 겹침을 형성한다. 이 작은 앰프는 참여 작가 김동용의 <Sender : 4th floor>(이하 <Sender>), 이 작업은 4층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신되는 소리를 1층의 전시 공간으로 송신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Sender>를 통하여 김동용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에 가장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작업을 선보이는데, 김동용은 1층과 4층을 아우르며, ‘레이어링이라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다는 - 어딘지 엔지니어적인 시점을 선보이면서 호버링의 구석구석을 소리로서 점유하고 반응한다.

 

김동용이 사운드를 형체 없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스피커를 숨긴다면, 서민우는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에서 하얗게 칠한 낮은 좌대 위에 스피커를 올리고, 미술 전시 공간 내의 하나의 입체로서 부각하여 소리가 근거하는 레디메이드 몸체를 노출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1층에 위치한 김동용의 <Sender>가 그 몸체만큼이나 작은 볼륨으로 조건적 청취 환경을 조성한다면,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1층 공간 전면에 나서서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행세한다. 서민우의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는 제목에서 엿보이듯 하나의 리믹스, 작가가 리믹스의 대상으로 정한 원본은 참여 작가 정완호가 언젠가 진행했던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이다. 이 퍼포먼스는 호버링에서 관람할 수 없고, 다만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작가의 조각만이 1층 공간 중심에 군데군데 놓이는데, 근원을 잃어버린 파편으로서 정완호의 세 가지 조각은 서민우가 전시한 저음 지향의 노이즈 사운드와 얽혀 다소 공허한 모습으로 전시된다.

보이지 않는 층위를 전제하고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 위치하도록 작업을 제시하는 일은, 작업의 진정한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도록 관람자의 경험을 제한하여 당장의 판단을 유보하는 블랙박스를 가설하는 일처럼 보인다. 여기서 스스로의 과거는 전시를 위한 발판이 되고, 협업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작업은 (이제는 익숙해진) 비기념비적 형태를 나타내며 급격하게 낡아 보이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처럼 당장의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임시성을 작업의 주요한 주제로 삼고 맥락화하는 방법론 자체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미술이 담론적 장소성개념을 통하여 합의했던 이해, 지금 눈앞에 현존하는 물체가 가시적이고 또한 비가시적인 여러 층위를 지시하는 물질 이상의 개념적 혹은 담론적 벡터라는 이해가 사라지고, 또 작업의 보이지 않는 과거와 층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준비된 비평적 관객성 또한 끝을 맞았으므로, 작업은 이제 무언가 흥미로운 전사前事를 담지한 가상의 구조물이 아니라 미적 물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파편이 나타내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성찰일 것이다.

 

호버링4층은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때문에 4층은 한 사람의 작가가 작업을 집약하여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그런 만큼, 1층 전반의 공간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작업의 양상에 비하면 4층의 광경은 보다 선형적 관람이 가능하도록 연출되어있다. 류수연과 전예진은 이런 공간적 조건을 강하게 활용하는데, 4층에서 그들의 작업은 보다 내재적으로 레이어링 된다. 요컨대 전예진은 전시된 영상 <꺾인 손가락>을 재료 삼아, 영상에서 크롭한 스틸컷을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끌리도록 내려오는 출력물로 변주하고, 또 그 스틸컷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에 표면으로 덮여 공간적 배경에 직관적으로 조응하는 이미지-오브제의 형태를 빌어 장식적 효과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한 편 4층에서도 사운드는 공간을 포섭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4층 천장 곳곳에 숨겨진 김동용의 작업은 ‘Hovering공중 정지라는, 전시의 주제 이미지를 무언가 반동을 받아 튕겨 나오는 듯한, 스프링 혹은 트램폴린적 소리-질감을 구현하며 비평한다. 4분 간격의 차이를 두고 여기저기서 튕기듯 들리는 김동용의 <Receiver> 연작은 1층을 (청각 차원에서) 지배하는 서민우의 작업에 대응하는 4층의 배경음악으로, 1층에 설치된 서민우의 작업이 앰비언트-지향의 저음을 구현하며 비교적 넓게 트인 공간을 메워낸다면, 김동용의 <Receiver>는 분할된 4층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마치 유령처럼 뜬금없는 타이밍에 놀래주듯 등장하여 전시 관람에 재미를 준다. 호버링에서, 거의 용역 혹은 사이드 킥과 비슷한 김동용의 보조적인 쓸모는 무척 두드러지는데, 작가가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한다거나 공간 내의 그리드를 새롭게 구획하거나 허물어 나간다는 둥 비유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전시의 목적을 1차원적인 해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구현해낼 때, 작업은 직해주의적literalism 성격을 띄면서 유머러스하게 읽힌다.

 

호버링은 많은 작업이 산개하듯 펼쳐지는 전시고 앞뒤가 맞거나 선형적으로 정렬되는 것과는 맞지 않는 전시다. 참여한 작가 수에 비해 전시된 작업의 수도 많을 뿐더러, 1층과 4층이라는 공간의 구분은 전시를 전체적으로 훑어 인상을 형성해내는 것을 막아서기도 한다. 게다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전시가 연출되므로, 전시를 마주하는 관람자의 경험 또한 각자 다를 수 있다. 요컨대 누군가 전시장에 입장해 입장료를 지불하고 작업을 볼 때, 처음 마주하는 작업은 순서상 1번이라 명기된 오연진의 작업일 수도 있고 1층 공간 중간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정완호의 작업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는 가장 눈에 띄는 크기로 늘어진 류수연의 <첫인상>을 전시의 첫인상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호버링은 많은 입구와 다양한 샛길로 연결된 전시지만, 이 전시는 하나의 출구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그 출구는 아마 4층의 가장 안쪽, 서민우와 김동용, 김효재와 지호인의 작업이 걸린 방이 될 것이다.

 

이 방에 입장한 관객은 아마도 가장 먼저 벽에 걸린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6><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을 관람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체리 연작을 관람한 관객은 일단 볼륨이 높은 서민우의 작업과 가까이 있어 크게 들리는 김동용의 작업을 뒤로 한 채 김효재의 <난 마돌: >를 관람하게 될 텐데, <난 마돌: >는 여러 기기에 담겨 전시되고 있지만 해당 영상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어폰을 착용해야만 한다. 허나 이어폰을 끼고 <난 마돌: >를 관람할 때 관객은 집중이 쉽지 않은데, 이것은 <난 마돌: >가 이런 저런 영상 정보와 그래픽 파일을 화면 위로 복잡하게 레이어링하며 비선형적 전개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곁에 위치한 스피커를 통하여 서민우의 작업이 <난 마돌: >가 담긴 기기가 제공하는 최대 음량 이상의 볼륨을 구현하며 청취 조건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아가 이 방에서 <난 마돌: >를 관람하는 일은 순전히 생리적으로 꽤 고통스러운 경험인데, 두 겹의 소리가 높은 볼륨으로 청각을 자극할 뿐 아니라 3분 간격으로 반복되는 김동용의 <Receiver: Over the window>가 예의 트램폴린-사운드를 한 겹 더 겹쳐내므로, 관객은 청각을 중심으로 과부하되는 감각 경험을 하게 되거나 혹은 단순히 귀가 아프게 된다. 이렇게, 호버링의 마침표 역할을 하는 이 방에서, 세 명의 작가들은 모의하듯 협업하며 전시를 어떻게든 잊기 힘든 경험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이 관람자의 시청각을 집요하고 세게 자극해낸다. 이토록 심란한 관람을 막 마친 관객이 방 건너편으로 넘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관객은 아마도 지호인의 <코발트 터쿼즈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마주치게 될 텐데, 폐허-전시 공간의 퀴퀴한 구석에 매달린 이 명도 높은 예쁜 색채는 관객이 방금 겪은 힘겨운 경험을 진정시켜주고, 나아가 전시 전반에 걸친 어떤 부정적 정서들, 이를테면 유령 시점의 우울함, 청년이 청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무력감 같은 것을 완화하거나, 혹은 내려다본다.

 

다시 호버링의 전제를 살펴보자. 호버링이 염두에 두는 미학적 전략으로서의 폐허가 신생공간이라면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폐허는 여전히 콘크리트가 다 드러낸 2/W라는 공간이다. 나아가 호버링의 서문에서, 기획을 맡은 권시우는 2/W의 과거, 커먼센터라는 전사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미술 공간 커먼센터는 서울에 산개한 여러 작은 전시 공간들이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하나의 미학적 경향으로 호명되기 직전의 시점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이때 커먼센터는 통인동의 시청각과 함께 젊은 운영자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안-대안 공간처럼 비춰졌고, 실제로 커먼센터에서는 어떤 종류의 젊음을 총체화하여 제시하려는 경향의 전시가 다수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은 젊은 층의 회화 작가들을 69명 끌어 모아 전시를 꾸민 개관전 오늘의 살롱이나 스트레이트 포토를 위주로 작업하는 사진작가들이 참여한 스트레이트 - 한국의 사진가 19, 그리고 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1인 가구의 생존법을 중심 주제 삼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창작자들을 그러모은 혼자 사는 법, 나아가 단체전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201610, 트위터를 통하여 전개된 미술계 내 성폭력 해쉬태그 운동을 통하여 커먼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던 함영준의 권력형 성범죄가 폭로되며, 그가 그간 관여했던 공간을 통하여 전개해온 활동 또한 폐기 처분되었다. 그렇다면, 호버링이 공간적, 또한 시간적 배경으로써 커먼센터를 지지대 삼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어떤 목표를 노리는 것일까? 이미 무덤이 된 커먼센터를 공간의 전사로서 인용했을 때, 호버링이 설정한 과거의 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렉터 함영준의 관여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커먼센터의 전시 중, 서울에서 젊음을 내세워 새로운 영역을 잠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시로는 이를테면 청춘과 잉여가 있었다. 유능사(최정윤, 안대웅)가 기획하고 김시습, 박희정, 윤율 리가 협력 기획으로 참여한 청춘과 잉여는 짝을 맞추어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를 제시하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의 미술을 각각 관통하는 특정한 주제와 경향을 가시화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젊음-새로움을 과거와 엮어내어 하나의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시도로서, 청춘과 잉여는 기성 작가에게 불충분한 가능성을 젊은 작가로부터 찾고, 또한 젊은 작가에게 불충분한 역사적 알리바이를 기성 작가를 투입함으로 해결한다. 일이 잘 풀렸을 경우, 이것은 아주 매끄럽고 단단한 몸체를 가진 관점으로써 한국 현대 미술이라는 가상의 타임라인에 효과적으로 진입하여 하나의 이상적 새로움을 부각시켰을 것이다. 허나 청춘과 잉여에서 보였던 젊은 작가와 기성 작가의 구도는 당연 완벽할 수 없었고, 짝지어진 작가들은 종종 서로를 견제하고 불화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어쩌면 이런 마찰이야말로 청춘과 잉여가 염두에 둔 효과였을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세대는 합선될 수 없었고 젊음과 새로움이 관계 맺는 구도를 다시금 되살펴 젊음을 역사의 한 축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성립되지 않았다. 어쩌면 호버링이 겨냥하는 것은 이런 구도에 대한 필요성 자체로, 오늘과 젊음은 너무나도 많이 말해지고 가능할 듯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당사자의 시점을 취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가정하여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가 주체로 나서 스스로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일 테다.

 

호버링이 연출하는 레이어링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인식한 채 전시를 관람할 때, 개별 작업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리적으로 작업이 뒤섞여있을뿐더러, 전시의 주제가 작업의 내적 논리와 전개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에 작업은 전시 자체와 여러 차원에서 합선되고 이 합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때조차 전시와의 연관 관계 안에서 파악된다. 이에 따라 호버링은 작업을 중심으로 꼼꼼이 보더라도 하나의 상황 혹은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 전시가 된다. ‘현자 타임을 보내는 중에 있는 현명한 젊음의 전시이자 하나의 잘 연출된 상황으로서 호버링, 폐허를 보기 지루하지 않도록 메우고자 노심초사하는 웰메이드전시의 업적을 성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양은 어딘가 무척이나 따분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유령 시점으로 끝맺음 될 수밖에 없는 슬기로움은, 호버링이 복잡한 레이어링을 통해 도달한 곳이 다름 아닌 웰메이드전시의 풍경이듯,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인 방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생각해보자. 젊은이가 유령이 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일까? 사람은 항상 죽지만, 늙은이에 비하여 젊은이는 어떤 통계를 통하여 보아도 항상 현저하게 덜 죽는다.4) 젊은이가 유령이 되어 도달한 저승에서 그는 아마도 수많은 늙은이들이 일종의 선배로서 적층된 광경을 보고 질려버릴 것이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유령 세상에서도 젊은이는 소수자로 남는 셈이고, 제약 안에서 자유롭고자 하더라도 새로운 제약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을 뒤바꿔, 젊은이가 제약의 건설자가 된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청춘과 잉여가 이런 저런 사정을 통해 단행본 메타 유니버스와 느슨하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엿보였듯이, 호버링이 선보인 것들이 이러저러하게 이런 저런 것들과 연결되어 이렇게 저렇게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이 될까? 말이 좋아 유령이지 실상은 하위 주체적 정체성에 가까운 가상의 시점은 폐기되어야 하고, 미완성의 우발적 전시로서 호버링은 폐허를 벗어나야만 한다. 말하자면, 호버링에 복잡하게 걸쳐진 여러 겹의 과거와 상황은 동시에 호버링적 상황이 벗어나야만 하는 일련의 목록이다. 호버링에게는 그런 제약을 전시의 재료로 동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가시화한 성과가 있고, 이제 이것은 다른 모습과 형태의 여러 프로젝트들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Lauren Cornell, New Age Thinking, http://mediaspace.newmuseum.org/ytjpressmaterials/PDFS/WHAT_THE_CURATOR_ARE_SAYING/03_Cornell_Essay.pdf

2) 권시우, 「《호버링Hovering전시 서문, http://www.90apt.com/hovering.html

3) 권시우, 공간 인터페이스, ‘압축과 팽창과 김동희의 사례, 계간 시청각, 1(겨울, 2017), 83.

4) 통계청의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수 구성비 중 0-39세의 연령이 차지하는 비율은 3.6%에 지나지 않는다. 자세한 사항은 통계청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참조.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6/2/index.board?bmode=read&bSeq=&aSeq=363268&pageNo=1&rowNum=10&navCount=10&currPg=&sTarget=title&s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