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roject/[저기-거기-접때-나중에]

시시한 세상의 참된 그림 : 이상훈의 작업에 대하여

시시한 세상의 참된 그림 : 이상훈의 작업에 대하여


황재민

 

이상훈의 평면은 많은 것을 발화한다. 그가 그려내는 각종 도형은 암호와 기호와 정보 사이를 오가며 화면 위로 압착된다. 이 과정에서 그리기와 회화라는 미디엄은 분절되어 다루어지고, 관습과 규칙의 형태로 미디엄을 구성하는 기억 혹은 기준 따위는 쪼개져 화가가 새롭게 리부트해 구축한 시점 아래 ()조망되고 또 정렬된다.

 


<Y TEST>, 2016-2017, Acrylic on stretched pre-sized linen canvas, 78 x 52cm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그러나 한 편, 어떤 회화의 특징을 발화에서 찾는 것은 얼핏 부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지난 시기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론이 활발히 매체들 사이로 틈입할 때, 전유는 언어가 되었고 확장된 장과 연관되어 펼쳐짐으로써 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했다. “발상이나 기원이 아니라 의미화의 구조2)가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특성이 되면서 회화 또한 메타적 미디어의 차원으로 편입되었고 그 결과 순수한 회화적 평면은 불가능한 이상으로 밀려나와 구태로 남았다. 이제 (말하자면) ‘비순수하게 변질된 회화의 표면은 종종 이미지가 수행하던 기능을 떠안은 무엇으로 이해되고, 그 여러 기능 중 발화 기능 또한 자연스러운 부속이기에, 갱신된 회화의 각종 요소 중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담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어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회화를 이와 같은 모델, 다원화된 미디어 복합체에 기여하는 메타적 형식으로서 파악한다면 이상훈의 그림이 갖는 발화 기능은 작가의 그림에 오로지 특징적인 무엇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난 역사가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을 가능케 했던, 미술의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진행되어 온 확장의 기조 또한 (그것이 무엇이든)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회화 역시 당시 매개되어 가졌던 특징을 일부 잃게 되었다.3) 이제 회화 표면을 담론적 장소삼아 미디어 기능을 수행하던 문화적 방법은 모호하고 흐릿한 것으로 보이고, 회화를 비롯한 미술 매체를 보다 관습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각이 새로이 등장한다. 기호적 지시물 혹은 문화적 매개물이 아니라 인상과 시각적 양식으로서 회화가 다시 관습적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미적 기술이 도입되는 화면, 나아가 물건으로서 바탕 위에서 표출되는 숨겨진 갈등과 각종 사정 따위를 표면 자체의 저항을 통하여 사라지게끔 한다. 회화의 역할과 작용은 그것이 근거하는 시각적 환경에 따라 유동하고, 그렇다면 이상훈이 회화를 통해 추상적 도상을 마치 설명하듯 전개한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이자 발화 행위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못일 수 있다. 작가는 시점을 설정하고 규준을 구체화, 법칙을 일반화한 뒤 그것을 정돈된 형태의 도상으로 형상화하지만 그 일은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미적 상황에서 수용자의 위치에 놓이는 누군가의 납득을 위하여 웅변하는 회화-이해-서비스라기보다는 새로이 갱신된 회화의 기능과 담합함으로써 하나의 영역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도를 갖는다.

 

이상훈은 유능사가 기획한 커먼센터에서의 단체전 청춘과 잉여를 통해 처음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청춘과 잉여에서 이상훈은 미디어버스에서 출간한 조영법(造影法) 1: 000-111(2014)을 토대로 책에 실린 다이어그램을 구체화 혹은 각색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당시 전시장에는 내걸린 작업 곁에 책 조영법이 함께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적극적으로 관람하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책 속 다이어그램과 다이어그램이 전시된 작업물 표면의 정보를 대차대조하며 작가가 연출해놓은 상황을 해석해볼 수 있었다. 조영법은 빛, 윤곽, 그림자, 모양, 또 부피와 같은 요소를 자의적으로 구분, 가시적 대상뿐 아니라 비가시적 대상까지 포괄하는 시각적 인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도서로서, 요소가 짝지어지는 경우의 수를 다이어그램 형식으로 설명하면서 회화적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 조건에 대해 검토해보는, 작가의 비전이 압축된 작업이었다.4) 물론 조영법에 쓰인 공식은 정교한 과학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작가 개인이 탐구한 결과물을 특정한 시점에 따라 일반화한 지식에 가까웠지만, 전시에서 조영법은 회화에 의해 매개된 방법론적 원천으로써 접근하는 관람자에게 작가의 시점을 주입하는 역할을 했고, 단순한 보조 자료가 아니라 작가의 비전을 수용자로 하여금 납득시키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인 오브제로 활용됐다.

당시 청춘과 잉여“1980년대 3저 호황을 토대로 문화의 시대를 연 1990년대 청년기대감소의 시대이후 2010년대 중반을 살고 있는 젊은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대를 각기 청춘잉여로 맥락화 했는데,5)청춘으로 설명된 기성 작가와 잉여로 명명된 젊은 작가가 짝으로 묶여 제시되었기 때문에 관객은 기성 작가와 젊은 작가가 보이는 상이한 맥락을 고려하며 전시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전시에서 젊은 작가 이상훈은 기성 작가 박미나와 짝지어지며 당시 미술에 있어 매체의 쓰임과 필요성이 무엇일 수 있을 지에 대해 부연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때 이상훈이 선보인 방법론은 박미나가 회화를 통해 탐구해온 독자적인 영역과 관련되며 오로지 자신이 고안한 규칙을 통해 (관념과 감각적인 것을 포함해) 회화, 아니 이미지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재규정해보려는” “전무후무한것으로, 그러므로 어느 정도 고립된 것으로 해석되었다.6) 청춘과 잉여가 당시 미술에 대해 설정한 맥락 안에서, 이상훈의 회화는 서구 모더니스트 회화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얼마간은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접근하며, 6, 70년대 한국 미술의 주먹구구식 형식주의에서 불가능했던 무엇을 진공 상태에서 시도하는 - 3세계적 고립에서 발생하는 역사의 비대칭을 동시대성 이후의 평평한, 탈역사적 시공간에서 재고하고자 하는 실증적 사례로서 다루어졌다.

 

이후 2017,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이상훈은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청춘과 잉여이후 약 3년 만에 치러진 개인전에서 작가는 다시 스스로 구축한 설정 아래 단일하게 정렬된 그림을 늘어놓았다. Two Tables라 이름 붙여진 본 전시에서 이상훈의 관심사는 여전히 회화를 구성하는 근본적 조건 및 요소들을 특정하고 분할하여 구체화하는 데에 있었지만, 조영법이 빛과 그림자, 윤곽과 모양 등 다양한 구성 요건을 포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회화의 존재와 그 조건에 대해 성찰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첫 번째 개인전에서 작가는 색상과 윤곽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관심을 한정하고 집중했다. 전시에서 회화의 조건, 또 요소로써 색상 그리고 윤곽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가 정립한 체계는 채석장이라 명명된 가상적 공간으로 시각화되었는데, 청춘과 잉여에서 이상훈이 시각적 인지의 체계와 회화의 조건에 대한 스스로의 비전을 납득 가능한 무엇으로 제시하기 위해 책 조영법을 일종의 매개물로써 제시했다면 Two Tables에서는 채석장이라는, 비유적이고 무엇보다도 가상적인 공간이 조영법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이 보였다. 당시 조영법이 독립된 실체로서, 하나의 작업으로서 전시된 것에 비해 Two Tables에서 채석장은 어디까지나 작업 뒤편에 전제되어있는 세계관으로 존재했는데, 이 때문에 채석장을 필터 삼아 작업을 재구성하는 방법은 조영법과 비교해보아 조금 더 비가시적이고, 조금 더 암시적이며, 그러므로 조금 더 어려웠다. 이상훈이 구축한 채석장과 그 작동 방식 또 논리 등은 블록 단위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하여 단순하고 직선적인 전개로 형상화됨에도 얼마간은 그와 같았다. 이 때문에 채석장을 구경하려는 작업-수용자와 채석장의 감독관7), 작업-제공자 사이의 이해에는 불일치함에 따른 간극이 발생했고, 어쩌면 작업의 논리를 전제하고 소개하는 상상적 공간으로서 채석장의 쓸모 중 하나는 이런 이해의 틈을 형성하는 것에 있었다.

 


<QUARRY>, 2016-2017, Acrylic on stretched pre-sized canvas, 86 x 140cm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Two Tables에 있어, 채석장은 관람 경험을 좌우하는 필터 역할을 맡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이해의 불일치를 형성함으로써 회화 관습의 조건을 고찰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관념과 물질의 개념을 매개/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채석장이라는 공간을 고안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안료의 원형이 결국은 돌가루라고 할 때 어떤 채석장이란 것이 존재 할 수 있겠다는 상상으로부터 출발8)했다고 부연하는데, 작가의 상상을 따라갈 때 (안료의 원형으로서) 돌가루와 (색상의 원형으로서) 선험적 지각은 채석장을 경유해 원형적 형태로 회귀하고 만나 가상적, 나아가 서사적 차원에서 매개되는 셈이다.9) 한 편 이와 같은 접근은 Two Tables, 그리고 그 주요한 주제로 나타난 채석장 내부에 한정된 방법론이 아니라 이상훈이 이끌어온 작업 세계 전반에 연관되는 무엇으로, 작가는 관념적인 무엇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옮기고 나타내고 싶다는 욕망을 회화의 형태를 빌어 표출하는 일에 언제나 주저함이 없기도 하다. 이상훈이 회화의 조건을 일반화하는 식으로 특정한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마감의 시각적 도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일면적 이해를 넘어서는 시각 언어에 대한 낡아 사라진 희망과 그것이 차출했던 영속적 가치에 대한 관심 혹은 믿음이 있다.

 

이상훈의 작업을 볼 때, 수용자는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를 짐작케 하는 남다른 디테일과 완성도를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하드 엣지 페인팅의 형식을 빌려와 바른 아크릴 물감의 도포 상태를 볼 때에도 의식이 가능하지만 특히 바탕Support10)의 모양을 볼 때 더욱 잘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조는 작업의 완성도와 시각적 해상도를 높이는 데에 적극 기여하기도 하지만 나아가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회화의 요소를 해체하여 재구성함과 함께 표면의 문제 이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이를테면 전시의 서문에서, 작가의 작업은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빛과 그림자 같은 광학적인 요소나, 색상이나 윤곽과 같은 조형적인 요소들”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포함하지만, 나아가 “서포트를 구성하는 프레임과 캔버스 천 같은 구조적인 요소들 까지도 포괄”11)한다고 평가받는다. 회화에 있어 빛과 그림자, 또한 색상에 이르는 요소들이 표면이 재현적/비재현적 형상을 매개하거나 표상할 때 도드라졌던 주제라면 윤곽을 조형적 차원으로 포섭하고, 또 회화 구조와 관련된 요소로서 프레임과 캔버스 천에 이르는 바탕의 문제를 지적할 때 회화는 표면의 매개물 이상, 측면과 후면까지 포괄하는 온전한 물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상훈이 영속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시대착오적 작업을 전개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해석은 역설적인데, 물건은 무엇보다도 회화를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끌어내린 주범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종 작업의 논리를 풀이하며 유클리드 기하학 혹은 관념적 색상 체계와 같은 지당한 옛 지식을 인용하곤 하는데, 이것은 회화를 규준화하여 나눌 수 있는 미술의 참된 표본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그 표본을 개념적/물질적으로 탐구함으로써 특정한 가치를 생산하고자 하는, (필연적으로 회화를 옛 지식 체계 중 하나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작업 세계를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되는 듯 보인다. 비판적 담론과 개념적 장소로서 기능했던 미술이 한때 형성했던 연결이 와해되고 유의미한 지식 체계가 재설정 되는 때와 맞물려, 이상훈은 작업이 비롯하는 배경의 소실점을 흐릿해질 때까지 뒤편으로 잡아당겨 해석이 어려운 블랙박스를 구축한다. 향하는 목표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 가상의 소실점은 기실 지난 시기 미래라고 호명되었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차후의 시간에 대한 기대가 공통 감각으로 잔존하며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관념 형태 혹은 시대감각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정하기 어려운 앎의 배경이 감각과 함께 변화할 때, 소실점을 잃어버린 개인이 가상적 상황을 재구축한 뒤 그것을 외피 삼는 것은 창작의 한 방법론이자 수신守身을 위한 방책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기고가 노정태는 문득 시시한 곳으로 전락해버린 어제-오늘에 대해 감각 차원의 무기력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 개인을 둘러싸는 배경을 탄탈로스적 부조리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12) 그에 따르면, ‘탄탈로스적 부조리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적 주체는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고 새로운 종류의 인식론을 발명하기 위하여 원초적 형태의 사회화 과정으로써 모방 개념을 전용轉用해 소실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드리워지는 소실점의 종류는 역사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의 예수처럼13), 적극적 오해와 논리적 추상화를 통해 신성함에 버금가는 내면적 깊이를 가상적으로 구현할수록 좋다. 빗대자면 이상훈은 회화의 형태를 경유하여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셈으로, 작가의 블랙박스 안에서 가상적 소실점은 모더니스트 회화의 내적 구조와 논리를 모방 및 재정의하여 등장하되 물건이라는 몸체를 직시하고 긍정하면서 회화를 둘러싼 여러 견해와 서사를 재설정하고, 이를 통하여 임의적 세계관을 형성한 뒤 가능 공간을 확보한다.

 

다시 이상훈의 회화를 회화, 아니 이미지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재규정해 보려는14) 시도로 돌아본다면, 이때 역시 작가의 회화는 특정한 미디엄이라기보다는 문화 구조 내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으로, 그 중에서도 형식주의와 관련한 담론적 은유로 표상되었던 셈이지만, 이제 회화의 역할은 담론을 은유하기보다는 관습을 은유하는 일에 더욱 가까워보인다. 담론이 표면의 영역에 한정되는 무엇이라면 관습은 손기술에 의하여 매개되고 나아가 물건의 영역을 점유하기도 한다. 실상 표면은 이제 더 이상 주요한 화두가 아니고, 몇몇 작가들은 측면과 후면을 표면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서 부각함을 통해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끈다.15) 관습이 주요한 층위로 활용되면서 매체는 미지의 외부를 매개하려는 확장된 장이 아니라 형태와는 상관없이 추상적 역사를 대표하는 연속체로 이해되고, 그에 따라 다층적 장소를 설정하더라도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한 외부를 지향하기보다는 매체 내부의 논리로 수렴한다.

 

Two Tables의 전시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 작업자이자, 연구자이며, 설계자이기도 한 어느 감독관의 작업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작가의 현재에 대한 관객의 질문이자, 회화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답변일 것이다.”16)

 

그러나 이상훈의 작업은 회화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보여준다기보다는, 회화와 미래라는 각기 다른 개념을 재정의하는 일에 더욱 가까이 관여하는 듯 보인다. 회화에 대하여 탐구하고, 탐구한 결과를 재구성하고, 재구성한 요소를 통하여 논리를 설정하고, 설정한 논리를 기반으로 가상적 소실점을 형성하고, 또 이 전반적 과정을 통하여 제시할 만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동안, 이상훈의 방법론은 점차 구체적으로 분절되어 조금 더 특정한 세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Two Tables에서 작가가 다룬 것이 색상과 윤곽의 문제였다면, 이제 또 어떤 문제와 요소가 고찰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될까? 빛과 그림자, 또 모양과 부피에서 이르기까지 작가가 이전에 회화의 근본적 조건으로 제시한 요소들이 여전히 세분되지 않고 남아있긴 하지만, 회화 매체가 갖추고 나타내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에 이상훈의 회화가 포괄하고 탐구하게 될 새로운 영역 또한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이를테면, 회화-물건 나아가 서포트-조각처럼 보이는 어제-오늘 회화의 형태를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과 시점을 통하여 재해석할 때, 그것은 어떤 양상으로 분절될 것이며 그 표면의 모양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까? 혹은 사그라진 미래와 오늘을 침범한 어제라는 뒤틀린 시간 감각과 그에 매개된 시각성의 문제는 회화의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특정될 수 있을까? 만약 특정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처럼 몇 가지 관습적 문제가 새로이 등장하기에 회화는 여전히 흥미로운 미적 물건이자 미적 상황일 수 있는 것이고, 회화에 기반을 두는 이상훈의 작업 또한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과 함께 한다.


1) ‘시시한 세상’이라는 표현은 노정태의 글로부터 영향 받았다.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워크룸 프레스, 2016), 194쪽. 

2) Douglas Crimp, 「Pictures」,『October, Vol. 8』(Spring, 1979), 87쪽. 

3) 할 포스터는 저서 <콤플렉스>에서 후기 모더니즘 회화의 환영성을 내파한 역사적 사례로 여겨진 미니멀리즘 미학이 실은 환영성을 내재하 고 있었으며, 그것이 ‘조각적인 것’, 또 ‘회화적인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확장에의 의지와 맞물리며 스펙터클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을 지 적한다. 또 그는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이 제공하는, 건축 차원에서의 미적 경험이 미니멀리즘 미학에 영향 받아 전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때 이 ‘미니멀리즘적인 것’은 미술관 건축이 상징하는 ‘모더니즘적인 것’과 혼동되며 결과적으로 얄팍해진다. 여기서 모더니즘 적인 것과 미니멀리즘적인 것의 혼동은 매체의 확장(좋은 시절)과 미술관의 확장(만악의 근원)의 교차를 시사하고,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겹쳐 보이며 좋은 확장이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듯하다. 할 포스터,『콤플렉스』(현실문화, 2014), 김정혜 옮김, 197-198쪽, 330-331쪽. 

4) 최정윤, 「조영법의 해제」. https://mediabus.org/1-000-111 

5) 《청춘과 잉여》전시 서문, https://neolook.com/archives/20141120e 

6) 안대웅, 「《청춘과 잉여》기획노트」,『메타 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미디어버스, 2015), 윤율리 편집, 274쪽. 

7)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8)《Two Tables》전시 서문 주석에서 참조. 전시를 기록한 313아트프로젝트의 웹페이지에는 주석이 나와 있지 않다. 

9) 그러나 『조영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체계는 여전히 엄밀하지 않다. 옐로우 펜 클럽에 포스팅된 루크의 글「: 채석 장과 컨베이어벨트」에 따르면,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을 1:1:1로 혼합하면 검정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 법칙으로 인식되는 익숙한 공식 이지만, 실제의 염료 PR과 PY와 PB를 섞으면 어두운 갈회색이 될 뿐 완전한 PBk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루크의 글에 의하면, 전시에서 색채는 도상이 나타내는 시각적 엄밀함에 비해 자의적으로 다루어지며, 이와 같은 자의성을 은폐하는 레디메이드 지향의 화면은 근대적 이 성 주체의 시점을 환기시키며 관객에게 압박감을 선사한다. 루크, 「: 채석장과 컨베이어벨트」 http://yellowpenclub.com/looc/twotables/ 

10) ‘바탕’은 대리석, 나무, 청동, 캔버스 등 미술 작품의 제작에 필요한 기초 재료를 지칭하는 ‘서포트Support’의 이상훈식 번역어이다. 바탕의 구조는 작업 제작에 있어 작가가 기술적으로 항시 관심을 표하는 요소이기도 한데, 작가는 2015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단단한 바 탕」이라는 제목으로 바탕의 조직에 대한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 「단단한 바탕」은 캔버스 천과 회화 프레임, 각종 물감의 종류 그리고 장단점 및 자재별 특성, 나아가 구입처와 브랜드 별 가격에 이르기까지 회화 바탕의 각 요소를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실용 적 성격의 강연이었다. 

11)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12)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인 탄탈로스는 저승에서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허기와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의 형벌을 받는다. 그의 벌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물과 먹을 것이 가까이 있어 볼 수는 있어도 가지려는 순간 그것들이 달아나기 때문에 손 댈 수는 없다는 점에 있는데, 노정태는 ‘진짜-진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 ‘진짜-진짜’를 가능하게 했던 경험적 배경이 모두 쇠퇴했기에 ‘가짜-진짜’ 혹은 ‘진짜- 가짜’ 사이에서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경험 세계를 이 ‘탄탈로스의 신화’에 비유한다.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워크룸 프레스, 2016), 198쪽. 

13) 위의 책, 179쪽. 

14) 안대웅, 「《청춘과 잉여》기획노트」,『메타 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미디어버스, 2015), 윤율리 편집, 274쪽. 

15) 이와 같은 경향에 대해서는 한국의 몇몇 젊은 작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환희는 거칠게 발린 붓질을 가다듬지 않고 남겨놓음 으로서 표면 위로 불거져 나오는 입체성을 찾아낸다. 이 붓질은 종종 의도적으로 조작/후가공 됨으로서 마치 표면에 달라붙은 조각처럼 보 이는 과장된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이환희는 이런 질감에 특정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회화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조각 작업과 같은 채널에서 운영함으로서 회화를 조각의 맥락에, 또 조각을 회화의 맥락에 교차시키곤 한다. 또 김미래의 경우, 작가의 주관적 시점에서 형성된 추상적 이미지 형태를 회화 표면 위로 전사하는 작업을 전개하지만, 해당 이미지는 표면 위에 납작하게 압착되며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측면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이환희의 작업은 작가의 웹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fanheelee.com/works.html) 김미래의 개인전 정보는 네오룩에 아카이브 되어 있 다. (https://www.neolook.com/archives/20170902g) 

16)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