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희 개인전 <Gambit> 리뷰
황재민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활용하는 매체의 한계나 법칙에 몰두하는 종류의 작가다. 이전 세기의 추상 미술에 있어 추상을 하나의 매체로 정의하고 법칙을 재설정하는 행위는 추상의 궁극적 형태를 위한 비평적 소실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평면성’이라고 정의내리고 설명한 그 소실점은 추상 미술의 역사에 있어 제약이자 동력이었고 지지를 받은 만큼 비판/극복되었다. 지금도 그린버그의 평론 활동은 추상 미술이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 중 가장 인상깊은 것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환희가 추상을 전개하며 사용하는 몰두는 이미 지나간 개념을 굳이 재활용하는 듯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환희의 실험은 어떤 비평적 개념이 아닌 전혀 다른 소실점을 향하고,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의 지난 역사가 제안하는 요구들을 그림에 쓰이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지침으로 오용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재활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동시대성의 시대에 포스트-프로덕션의 논리와 구조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이 부여하는 형식적 틀과 겹쳐지며 발생한 미적 미디엄의 추상화는 경험의 영역에 힘을 싣는 것으로 전시 공간에서의 미학적 행위를 다시 썼다. 사물과 이미지, 그리고 그 속에 집적된 세계 혹은 그냥 환경을 기호화하여 조작하는 행위가 지배적이었던 지난 시기의 미술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의 수공예적 속성은 퇴색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수공예적 기반을 가졌던 전통적 매체, 특히 조각과 회화는 과거의 역사와 단절되었고 보통 이미지나 담론을 투사하는 장으로서 다시 읽혔다. 그러나 사물이 세계를 압축하거나 상징한다는 생각이 점점 무딘 것으로 닳아감에 따라 이제 껍데기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이, 전통적 매체에게는 ‘어째서 매체인가?’라는 질문이 갑작스럽게 주어졌다.
이런 질문의 배경엔 ‘컨템포러리 아트’의 유효성이 다한 때와 초 단위로 축적되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역사를 평면화하기 시작한 때와의 공교로운 만남이 있고, 그 때문에 껍데기의 효용에 대한 고민은 시각성의 변환을 추적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이유를 갖지만 그만큼 좀 난처한 것 또한 된다. 시각성과 얽힌 큰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들이 드문 반면 전통적 매체는 그것이 갖는 불시착한 느낌, 시간과의 서먹함을 해명하라는 요구에 갑작스레 직면한다. 이와 같은 과도기에서는 매체의 법칙이나 역사를 비평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 반면 관습적 차원에서 손과 눈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 또한 있고, 이환희가 두 번째 개인전 <Gambit>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또한 어쩌면 이런 중첩과 관련이 있다.
<Gambit>의 첫 번째 작업은 <Katana>라는 이름으로, 이것은 폴리우레탄 고무와 레진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조각이다. 제목을 따라서 바라보자면 ‘카타나’, 무언가 검의 형상을 시각화한 것인가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검에게 베어진 단면에 대한 생각도 떠오르지만, 전시장을 둘러볼수록 진입과 동시에 만나게 되는 이 조각이 거친 표면의 질감을 유사-캔버스의 형태로 보여줌으로 회화적 평면과 조각에 관한 농담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순서를 따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작은 화면들(<Cure>, <Call It Gala>)은 붓질과 화면의 구획, 알키드 레진의 도포 따위를 통해 장식적 화면을 만들고 그것은 법칙과 역사, 한계와 전통이 교차하는 이상한 논리의 장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아마 그때 관객은 스스로가 매체 양식의 게임장으로 입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어 캐스팅된 알루미늄 조각(<Plaster>)울 지나치면 전시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큰 회화인 <Gala>가 보이는데, 처음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터치로 메워진 중앙 양측 화면에서 작가가 물질성을 구현하는 방식에 시선이 끌리지만, 뒤로 물러나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다 보면 알키드 레진과 물감이 교차되어 발린 화면 상단의 구획으로 눈이 향하고, 이어 그 구획을 캔버스 하단의 구획과 대조하여 보게 된다. 상단의 것이 물감과 알키드로, 또 평평한 면과 물감이 뭉친 입체적인 면으로 잘게 나뉘는 반면 하단의 것은 세 부분으로 조용하고 크게 나뉘어 대비되는 느낌을 주고, 이런 상단과 하단의 비교는 같은 화면 안에서 병치되며 통일성을 방해하는 데 쓰인다. 또 중앙 화면의 붓질이 만드는 격렬한 효과를 따라 <Gala>를 다시 보면 붓질의 이상한 사용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림 상단부 점점이 발려서 길게 늘어지는 붓질과 그와 달리 둔하게 뭉쳐 이어지는 하단부의 물감이 마치 어떤 테두리처럼 보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모양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물감을 뭉개거나 평평하게 바르지 않고 쌓고 집적시켜 입체를 형성, 결국 어딘가 조각적인 효과를 주는 붓질의 이런 사용은 <Gala>를 비롯한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데, 이에 따라 매체의 관습에 대한 비평은 평면 위로 입체를 쌓아올리는 것과 교차하여 펼쳐진다. 평면 위에서 전개되는 이런 적층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매체를 같은 층위로 포섭하면서 매체의 법칙 - 습관적 역사라는 차원에 대해 하나의 논평으로 작동한다.
붓자국을 조각화하는 것, 우연적 감흥을 조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러한 충동을 일으키리라 짐작되는 기법을 시늉하는 것, 이렇게 무언가 통제되는 느낌은 그림에 비평적 효과를 투여하기에 주요한데, 이런 감상은 이어지는 회화를 보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Reverse Sweep>으로 시작하여 <Certainty of Yours and Mine>를 거쳐 <Ancient Chinese Maneuver>로 마감되는 전시장의 한 쪽 구석은 마치 그런 종류의 회화적 논평을 드러내는 전시장 속 전시장으로 쓰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Reverse Sweep>은 <Gala>에서 사용된 날카로운 터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한 편 화면에 양식적 구성을 집어넣는 식으로 그게 우연성이나 암묵지의 숙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또 <Certainty of Yours and Mine>는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화폭을 따라 격렬한 구성을 만들지만, 실상 그 곳에서 작가가 보이는 화면은 어딘가 악랄한 연극의 무대에 가깝다. 화면 중앙 빈 캔버스를 연기하고 있는 물감의 밀린 자국과 그 주위를 폭발적으로 에워싸는 붓자국 혹은 울퉁불퉁 패인 매스는 잠깐 보면 어떤 감정을 자아내려는 듯 보이지만, 물감의 위와 사이사이 틈새로 도포된 폴리우레탄 고무의 사용은 그 폭발이 세심하게 꾸며진 결과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결국 그림을 통해 ‘뜨거운’ 감정을 자아내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이제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무엇이라고 잘라내는 것이다.
<Gambit>에서 화폭의 가로 길이는 종종 비평적 용도로 이용된다. 이것은 앞선 <Certainty of Yours and Mine>에서도 보이는 사례지만 <Lancer>의 경우 가로 길이는 마치 각자 다른 평면의 연결처럼 꾸며지면서 실험적 효과를 배가한다. 작가는 <Lancer>에서 물감과 알키드 레진을 바르고 밀어내는 식으로 평면을 구획하기도 하고 모티브를 반복하기도, 또 붓질을 전시하며 단순히 색채나 재료의 사용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어 볼 수 있는 <Marauder>에서, 관객은 모노크롬 풍의 색채가 지배적인 전시장에서 예외적인 색의 사용을 구경할 수 있고, 또 젊은 작가의 (때 이른) 자기복제에 대해서도 농담 같은 단편을 찾아볼 수 있다. <Marauder>의 상단 중앙 작게 도포된 살색 물감은 이환희의 지난 개인전 <Fanhee Lee Solo Exhibition>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던 색채이며, 또 그 위, 좀 더 작은 물감 혹은 입체는 작가의 이전 작업인 <Gargoyles>를 연상토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Marauder>에서 드러나는 자기복제적 경향에 대한 유희는 이환희가 한때 작업을 만드는 방법론에 이름 붙이고 사용했던 “클라우드”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Gambit>에서 잠시 얼굴을 내미는 이런 흔적, 기억의 미니어쳐는 실존하지 않는 클라우드의 데이터 센터로부터 저장된 모티브를 다운로드하여 사용하면서, 유사-알고리즘으로서의 작가가 스스로의 선택을 어떻게 제어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돌이켜보도록 만든다. 모티브의 사용을 두고 보았을 때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과 첫 번째 개인전은 <Marauder>에서의 농담을 통하여 연결되지만 그 고리는 무척 가늘고, 가상적 클라우드의 임의적인 운용을 통하여 이환희는 어느 정도 전반적인 작업을 동기화시켜 사용하지만 알고리즘을 운용하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자의성을 띈다.
<Marauder>를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공간으로 넘어가면, 우선은 조각인 <Mediocre Porn>에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다. <Gambit>에서 사용된 조각들, <Mediocre Porn>을 비롯해 <Katana>와 <Plaster>, 그리고 <Understatement>와 <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에 이르기까지 - 이번 개인전에 전시된 이환희의 조각은 어딘가 빈 공간에 놓여 매스의 재미를 주며 아이캔디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할을 맡기 위해 덩어리는 표면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이고, 그에 따라 3차원을 배신하고 평면적 효과를 띄는데, 이는 캔버스 평면 위에서 물감이 입체적으로 쌓아지며 만드는 덩어리진 느낌과 조각의 매스 위에서 크게 덧칠되고 말라 오히려 회화적인 감상을 주는 표면을 다시 조각과 회화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매체 사이로 꿰맞추면서 아이러니컬한 교차를 만들어낸다.
<Mural Pattern>은 색채라는 측면에서 가장 예외적이고 또 아름답다. 이환희는 마냥 균일하거나 평평하게 색을 바르지 않고 언제나 돌출되고 튀어나오도록 물감을 사용하므로 색채에 집중할 때에도 보는 즐거움은 입체적이다. <Mural Pattern>과 더불어 걸린 두 점의 대형 회화(<Booty Calls>, <Redemption>) 또한 구획을 나눈 뒤 그것을 의도와 비의도가 맞닥뜨리는 순간으로 연출하고, 이런 연출을 감독하기 위해서 작가는 물감을 일그러지게 바르고 쌓는 붓질을 계획한다. 이 같은 붓질은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만지고 따져보는 즐거움을 주고, 즐거움이 회화의 크기와 결부되면서 <Booty Calls>에서 <Redemption>을 거쳐 <Mural Pattern>으로 끝나는 이 라인은 작가의 그림이 갖는 수공예적 속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구간으로 작동한다.
전시에서 <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이 유일한 구작으로서 구석에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전시의 실질적인 마침표는 <A Gun Girl>과 <Saucy>의 담당인 듯 하다. 두 그림은 전부 비재현적 이미지를 나타냄으로 시각적, 또 청각적 효과를 갖는데, <A Gun Girl>이 연필선으로 그려진 주제를 붓터치로 재연/확장하면서 앰비언트적인 효과를 만든다면 <Saucy>는 모티브의 반복을 통해서 비트를 형성하고, 이것은 동일한 모티브의 확장 가능성을 점치게끔 한다. 말하자면 이환희의 개인전은 ‘끝’이라는 자막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 ‘다음 시간에 계속...’ 같은 걸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대체로 하나하나의 작업에 대해서 세세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복잡한 화면 구성을 통하여 작업에 대한 분석적 시선 - 그림을 붙잡고 따져보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시선을 요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화면은 그 자체로 작품의 질quality 개념에 대한 논평이 된다. 다만 이전에 질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대개 예술의 존재에 관한 감동이나 감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있었다면 지금은 어디로 어떻게 향하든 ‘현타’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현타’로 상징되는 감정적 불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상에 대한 인식으로 활용되기에 흥미로운데, 이환희의 회화적 시뮬레이션 혹은 조각적 붓질은 매체의 관습과 법칙을 재료 삼는 메타적 성질을 가짐과 동시에 작업에 캐릭터를 부여하는 표현적 충동을 “기술적 지지체” 개념으로 활용하면서, 이런 세계상을 반영하는 만큼 또 우회한다.
이환희는 작업을 구상하는 이런 저런 모티브를 가상의 데이터 센터에 아카이빙한 뒤 클라우드 컴퓨팅의 논리를 실험하고, 이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수공예 기술을 기능적으로 장착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꿈꾸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빗댐은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 보면 “제시된 조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작업의 몸통으로 삼”는 방법론의 확장/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작가가 근거하는 조건은 “현실의 온전한 일부“를 가장하지 않고, 클라우드가 개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를 데이터 센터의 데이터로 이동시켜 공유하는 것처럼 현실의 일부 또한 직접적으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 차원에서 구조화된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세계는 이제 게임 엔진의 물리 법칙으로 구성되듯이 온전한 파악과 수정이 가능한 자족적 모양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특정 역사의 추상적인 복제를 허용한다.
현재 많은 이들이 역사적 매체에 대해 말하면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매체 자체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회화와 조각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꾸준히 사용되어 왔으며,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에, 매체를 갑작스레 새로운 것들을 반영하는 예외적 현상처럼 다루려는 것 자체가 호들갑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 매체들이 스스로를 유효한 미적 미디엄으로 재-정체화하려고 시도할 때, 오히려 그것은 단단한 역사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역설이 있다. 특히 비교적 젊은 한국의 작가들은 오래된 매체 형식을 통하여 작업을 전개할 때 구체적 역사를 선별하여 지시하는 대신 모호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큰 틀로서 다루고, 이런 모습은 스스로를 빈 공간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의 일부를 쪼개 특정성을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엄을 개발하거나 발견하는 일 자체가 무효화된 시점에서, 매체의 널리 알려진 지속성은 오히려 은유적인 속성을 갖고 단절의 매력은 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환희가 작업 세계를 설명할 때 때로 사용하는 ‘게임’의 비유는 법칙과 관습을 꼬아 엮으며 유희하는 방법론으로 읽히지만, 나아가 화면과 덩어리 위로 손기술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매체 형식을 빈 칸으로 만들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려는 방법론이기도 하고, 이런 종류의 게임이야말로 작가가 <Gambit>에서 염두에 두는 속셈이다.
1) <Weekend: 이환희 작가와의 대화>, https://goo.gl/KYP2Bv
2) 임근준, <제시된 조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작업의 몸통으로 삼기>, http://chungwoo.egloos.com/3424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