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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괴물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 심혜린 개인전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 리뷰

회화/괴물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 심혜린 개인전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 리뷰


황재민


근래 몇 년간 전통적 매체가 부상하고 새로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반응도 뒤따랐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미술의 오랜 형태에 대한 스스로의 애정을, 그리고 지난 동시대 미술의 매체 형식에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보수적 감수성을 고백하며 귀환한 매체를 환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런 매체들, 그 중 특별히 추상화가 경매 시장에서 흥행함에 따라 양산되는 추상적 이미지들을 좀비 포멀리즘이라고 부르며 우려를 표했던 의견도 있었다. 새로운 추상이 마구잡이로 양산되며 이미지 차원에서 닳아 사라진다는 문제를 제기했던 평자들은 이와 같은 양적 팽창이 가능한 시대의 스타일을 마구잡이로 섞어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쇠퇴시킨다는 점, 또 시각적 유사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추상적 화면들이 인터넷을 통해 마구잡이로 공유/증폭되면서 개중 좋은 작업조차 거의 주목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회화의 귀환에 우려를 표했다.

2017년인 현재 좀비 포멀리즘이 하나의 화두로 제시된 지 3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회화와 관련한 논의는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비슷한 경향을 갖는 회화 작업들이 여기 저기에 등장하고 평가 역시 대동소이하다. 주된 시각적 모티브나 주제는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논자들이 좀비적이라고 정리했던 몇몇 특징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또 작동하고 있다.

 

2013년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렸던 전시 <페인터 페인터Painter Painter>, 그리고 2014년 화제가 되었던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회화 전시 <영원한 지금: 무시간적 세계의 동시대 회화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 비교적 젊은 작가군의 회화 작업을 대규모로 전시한, 흔하지 않은 사례로서 주목 받았다. 워커아트센터의 <페인터 페인터>가 조작할 만한 미디엄이 다양화된 동시대 미술의 시기에 어째서 작가들은 구태여 회화라는 매체 형식을 선택하고 작업하는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시를 조직했다면, <영원한 지금>은 젊은 작가들이 좀비라는 이름을 얻은 문제적 상황을 조명하고 그에 대해 답하고자 했던 경우였다. 규모와 공신력을 지닌 기관 중 새로운 작가들의 추상 회화를 다룬 전시가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관계로 모마의 <영원한 지금>은 마치 새로이 등장한 추상 회화의 얼굴 마담 같은 것으로 되어 많은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큐레이터인 로라 홉트먼이 새로운 추상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가 윌리엄 깁슨으로부터 빌려온 단어 무시간성’, 동시대성이 붕괴하고 모든 시대적 양식과 모티브가 공존하게 된 무질서 상태와 그런 초평면적 시공간 아래 회화가 과연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 지에 대한 내용이 여기저기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중첩되지 않고 수평으로 무한히 늘어나며 형성된 새로운 시공간이 있으며 젊은 작가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는 점은 새 그림들에 좀비라는 이름을 붙였던 논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 아카이브가 급격히 팽창하며 가져다 쓸 만한 시각적 모티브들이 많아짐에 따라 과거의 선례들이 역사적 특정성을 잃고 장식으로 전락하는 환경과, 젊은 회화 작가들이 그런 배경을 인식하거나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회화는 장식으로, 심지어 하나의 화폐 단위로 바뀌었으며 전혀 긍정적이지 못한 팽창이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적 논자들은 우려했다.

 

반면 <영원한 지금>에서 로라 홉트먼이 정리한 추상의 네 가지 경향은 전부 무시간성을 토대로 삼는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재활성화Reanimation, 재연Reenactment, 샘플링Sampling, 전형The Archetype으로 각각 분류된 새로운 추상 미술의 특징은 거대한 아카이브로 화한 디지털 세계를 일상적/예술적 배경으로 갖고 평면화된 과거-현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신경을 쓴다는 점에 있다. 선형적 시간축이 함몰된 이후 도래한 영원한 지금은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고 의미의 구별 없이 섞어버리는 식으로 부정적 환경을 증축하지만, 시각을 달리함에 따라 그것은 오히려 과다 공급되는 정보에 의해 하이퍼하게 정체되어있는 포스트-인터넷 환경에 대해 탈출구를 제공한다. <영원한 지금>이 지시한 가능성, 아마추어 역사가로서의 작가들이 모더니즘의 역사를 리믹스해 만들어내는 프랑켄슈타인 같은 ()역사적 양식 또한 그런 종류의 시각 중 하나로, 이런 접근은 시공간 없는 시대의 제약을 역이용 할 수 있는 발판으로 나타난다.

 

밀도 높은 추상적 화면을 전개하는 작가 심혜린은 스스로의 작업을 연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심혜린의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은 즉흥적 시도에 의하여 탄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자생적으로 자라난다. 심혜린은 세 번째 개인전의 제목을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라고 내걸었는데, 이때 촘촘함은 추상적 화면을 만드는 개별 형상들이 즉흥적/자생적으로 파생되면서 밀도 있게 프레임을 메우는 모양을 형상화하며 반짝임은 추상의 관람자들이 크게는 화면을, 좁게는 각각의 형상을 주시할 때 파생되는 의미망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다.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는 심혜린의 세 번째 개인전이고, 화면을 구성/전시하는 이런 방법을 과거의 전시들이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작가의 추상에서 요점은 비스무리하다. 심혜린은 추상을 구상하는 데에 있어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몇 가지 형상으로부터 시작해 밀도를 높여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몇 개의 의미나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관객이라는 바깥으로 아웃소싱한다.

 

그렇다면 심혜린의 추상은 좀비 같은 것일까, 아니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것일까? 심혜린은 자신의 그림에 연대라는 단어를 쓰지만 그것은 흔히 쓰이는 용례를 따라 사회적인 연대, 바깥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의미하는 연대는 추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형상들이 만드는 연대, 밀도를 높이고 프레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내적인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심혜린의 그림은 특정한 목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화면을 시각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규칙을 설정하고 그것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이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좋고 편리한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살고 작업하는 청년 작가 특유의 빈곤함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심혜린의 추상은 대체로 역사적 양식이나 기존의 평면으로부터 취할 것이 거의 없음을 이야기하고, 또 스스로 창조한 우연적 형상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화면을 빈 곳 없이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결과 밀도 높은 화면과 선배가 없는빈곤함은 나란히 놓인 채 대조되어 보인다.


<Slipstream>, oil on canvas, 130.3×163.3cm, 2016 

(http://www.gallerychosun.com/cor/exhi/exhi_info.htm?serial=e170709_001)

 

이런 방법은 독창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 어디로 가든 과거로 끌어당겨질 수밖에 없는 이상한 지금에 있어 이런 방법은 오히려 그런 배경을 모르는 척 하는 것,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도를 가진 행동이기도 하다. 만약 심혜린의 방법대로 과거를 아예 모른 척 한다면 어떤 것이 생겨날까? 스스로가 스스로의 나침반과 이상향이 되는 이상한 구조를 형성한다면 무엇이 나타날까?

 

심혜린의 회화는 종종 회화가 아닌 다른 포맷으로 독립한다.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 중 추상을 구성하는 개별 형상을 조작해 압축 스티로폼 조각으로 유출한 <얇은 조각> 시리즈나 이전 개인전에서 작가가 선보였던, 하나의 그림을 한 권의 책으로 변환하는 작업인 <BLURAY> 시리즈가 그런 경우인데, 이런 작업은 심혜린이 하나의 추상을 완성하는 방식, 랜덤한 형상이 또 다른 형상에게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꼬리잡기 한 뒤 완성된 화면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을 회화 바깥으로 끄집어낸 것과도 같다. 하나의 포맷은 특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전혀 다른 매체로 바뀌고, 그래서 고정된 의미나 위치를 갖는다기보다는 분열하고 소모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낭비와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건 소모할 수 있는 재산이 있어야 창작이 가능한 시대에 맞추어 이럭저럭 자력갱생하고자 힘쓰는 일에 가깝다 - 다만 그 주재료가 역사적 양식이 아닐 뿐, 넓게 펼쳐진 초평면적 세계를 부분 부분 짜맞춰 갈 길을 만드는 것은 유사하다. 역사가 단순한 땔감으로 소모되고 과거와 현재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이는 포스트-인터넷 환경의 레트로 현상이 좀비들을 양산하고, 이와 같은 상태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역사적 형태를 긍정적으로 차용하는 방법이 거론되는 한 편, 심혜린은 잘게 흩어진 시간의 파편을 활용하지 않고 순환하는 내적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택한다. 이 방법을 통해 포맷은 분산되고 의미는 유동하며 회화는 유예 공간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작업의 동력으로서 과거를 수용하는 일이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배경이라면, 어째서 젊은 작가들은 벌써부터 다른 과거가 아닌 자신의 가까운 과거를 동력으로 삼는 것일까? 새로운 무언가를 해내는 게 어렵고 그런 만큼 무얼 하든 존재하는 공간을 분할하여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는 지금, 누군가에게 역사는 너무 희미한 것이고 자신은 비교적 가까운 것이다. 꾸준히 작업하여 만들어 내는 관성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이고, 또 시대를 견디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회화는 보통 이런 관성의 전형이고, 그런 만큼 이 영역에서 자신과 쉽게 혼동된다. 이제 미술은 괴물 같은 것이 되어야만 그나마 활동이 가능하지만 또 어떤 종류의 괴물이 가능할 것인가, 그건 아직 널리 알려진 바가 없고 새로운 괴물의 유형이 등장하기 전까지 어쨌든 누군가는 기다려야만 한다. 그때 다시 관성의 필요가 요구될 것이고 심혜린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관성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