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포스터
2018년 12월 19일부터 2019년 4월 21일까지, 취미가는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을 다시 연다 – “132명(팀)의 특별한 에디션, 작업의 부산물, 작품과 굿즈, 소장품, 특별히 선별된 물품을 4개월간 선보”인다.
첫번째 《취미관》이 열린 것은 2017년이었다. 2018년에 열려서 2019년까지 지속되는 두번째 《취미관》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공간 취미가의 독립적 아트 페어 같은 게 되어서 어떤 연속성을 가지게 된 듯 하다. (물론 기금은 받는다.) 허나 올해의 《취미관》과 2017년의 《취미관》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두 《취미관》은 지속성이 다르다. 2017년의 《취미관》이 단 4주의 시간에 불과했다면 18-19년의 《취미관》은 다섯 달 동안 유지된다. 시간적 여유가 늘어남에 따라, 참여하는 작가(팀)의 수 역시 불어난다. 2017년의 《취미관》이 35명의 작가(팀)을 수용했다면 18-19년도의 취미관에서는 132명(팀)이 투명한 렌탈 케이스 안에 작품, 굿즈, 혹은 그 어떤 것을 납품한다.
취미가 공간에 ‘렌탈 케이스’가 놓이고 케이스 안에는 ‘그 어떤 것’이 놓인다는 포맷은 큰 틀에서 유지되지만, 세부 역시 2017년과는 조금 달라진다. 첫번째 《취미관》에서, 장식장 하나에는 하나의 작가(팀)이 입점했고 이것은 꽤 명료한 방식이었다. 한 명의 작가(팀)은 하나의 케이스라는 제한을 갖고 그 만큼의 (부)자유를 구현한다. 허나 두번째 《취미관》에서 이 명료한 법칙은 사라진다. 작품은 흩어지고, 작가는 뒤섞이며, 중력은 산개한다. 2017년의 《취미관》에서 작가(팀)이 중심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 2018-19의 취미관에서는 작품, 굿즈, ‘그 어떤 것’이 중심이 된다.
2018-19년의 《취미관》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팝업스토어일까, 독립적 형태의 아트 페어일까, 혹은 포스트-굿즈를 매개체 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의 구현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취미관》일까? 《취미관》은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한 영역에 놓인다. 이것은 《취미관》이 어디까지나 취미가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취미가라는 제한은 《취미관》으로 하여금 케이스를 만들도록 부추긴다. 케이스는 작품에게 알맞은 크기와 형태를 요구한다. 케이스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스케일을 재조정한 작품은 조금 다른 맥락을 획득한다. 이렇게 《취미관》은 굿즈라는 (비)형식의 짧은 역사와 어떻게든 연결되어버리는 플랫폼이 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단면적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B½F의 사무실에서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 출발한 ‘굿즈(g8ds)’는, 반지하와 함께 취미가 공간의 전신이다. 나는 그때 ‘굿즈’에서 판매되던 어떤 작업을 기억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돈선필의 <BOX gHOST figure>(2014) 같은 작업인데, 작업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거의 농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엽서와 뱃지, 그리고 작은 책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본격적인 조형인 <BOX gHOST figure>가 주는 황당함 같은 게 있었다. 작품이라기엔 너무 저렴하지만, 굿즈라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 역시 물음표였다. 그 탓인지 <BOX gHOST figure>은 꽤 오랫동안 판매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취미관》과 같은 공간에서 <BOX gHOST figure>와 같은 조형은 흔하고, 황당한 기분을 만들지도 않는다. 반지하 시기의 어떤 비전은 여기서 부분적으로 성취된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무언가 성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굿즈’가 《굿-즈》를 거쳐 ‘포스트-굿즈’가 되면서 복잡해진 사정과 관련이 있다.
BOX gHOST figure, FRP, 혼합재료 도색, 원목 베이스, 300 x 135 x 100(mm), 2014
(사진 출처: ‘굿즈’ 텀블러 페이지 http://g8ds.tumblr.com/post/95093496998/%EB%8F%88%EC%84%A0%ED%95%84-box-ghost-figure-2014-sold-out-frp)
허나, 우선은 올해의 《취미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한다. 132명(팀)에 달하는 숫자가 말해주듯, 작품의 수는 무척 많았고 볼 것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먼저 김혜원의 작은 부조가 조금 재미있었는데, 문구 상자 안에 꽉 찬 입체는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고 어디로든 쉽게 수납될 수 있는 이동성을 확보한다. 김혜원은 과거 정물화, 혹은 풍경화와 같이 보편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 산출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그림에 적용된 자신의 ‘그리기’ 방식을 역산한 뒤 언어로 정리, 체계화한 다음 그 체계를 뒤섞거나 제한하여 이미지를 제작하는 실험을 전개했는데, 《취미관》에서의 부조 역시 작업의 이런 차원과 관련이 있다. 김혜원이 그리는 그림이 3차원을 재료 삼는 2차원 이미지라면, 부조는 “2차원으로 완결된 3차원 세계를 다시 3차원으로 재현하는 작업” 1으로, 부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리기 체계의 일부인 ‘양감/부피 만들기’는 물감이 아니라 스컬피를 통해 구현되고 2차원적 물성이 3차원적으로 재현된다. 작가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풍경화, 혹은 정물화 같은 그림을 종종 그리는데, 이 이미지는 작가가 몸에 익은 그리기 수법을 극복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거기에 자신을 맞춰나간 결과로, 실은 깊이가 무척 얕은 형상이다. 《취미관》에 전시된 부조 위에서도 풍경/정물화적 이미지는 등장하는데, 김혜원의 부조가 갖는 2.5차원의 부피감은 이미지의 ‘얕음’과 공모하면서, 평평하지만 평평하지 않은, 이미지-물체로 거듭난다. 또 김혜원은 ‘3dknittinger’라는 이름으로 뜨개 인형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이는 작가 한진의 드로잉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취미관 속 조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였다.
'3dknittinger'의 뜨개 조형, <bumpy>, <mao>, <hi>,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77873158848372741)
한편 정희민은 과거의 작업을 확장한다. 정희민이 전시하는 아크릴 조형은 2018년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인 《UTC-7:00 JUN 오 후 세 시의 테이블》로부터 튀어나온 것이다. 전시에서 정희민은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낸 가상 공간을 다양한 층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캔버스 위로 옮겨냈는데, 로-파이한 3D 모델이 캔버스 위에서 거의 1:1로 재현되는 동안 불투명한 겔 미디엄은 캔버스 화면을 부분적으로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노이즈 역할을 했다. 이 겔 미디엄은 이제 《취미관》에서 아크릴 조형으로 독립하는데, 이 입체 역시 주변 출품작들을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흐릿한 채로 있는다.
회화를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취미관》의 ‘렌탈 케이스’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는가 관찰하는 관람은 흥미롭다. 이를테면 유지영은 휴대 및 전시가 용이한 소형 회화 키트 같은 것을 판매했는데, 이것은 회화 매체를 《취미관》이라는 특정한 플랫폼에 출품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스케일이라는 문제와 디스플레이라는 문제에 맞춰 작업을 최적화한 결과다. 유지영이 《취미관》에 출품한 작은 회화에는 손잡이가 달린 나무 케이스가 부착돼있고, 케이스 뒤편에는 이케아 스타일의 사용자 매뉴얼 같은 게 동봉되어있는데, 케이스와 매뉴얼을 제공함으로써 유지영은 회화를 직접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굿즈를 수행, 문제를 해결한다.
Pre-product of Plate VIII, Acrylic paint and pencil on canvas, wooden frame with handle, printed instruction guide, screw, command tape, CoA, 31.5 x 21.4 x 2.5 cm (incl. the frame), 2018
(Special Edition for TasteView at Taste House)
(사진 출처: 작가 홈페이지, https://jiyoungyoo.com/Pre-Product-of-Plate-VIII)
또 그림에 대해서 말하자면, 호상근은 이번의 《취미관》에서 작은 그림도 팔고 또 작은 피규어도 파는데, 이 그림은 “큰 작업을 하기 전에 하는 실물 미니어처”로서, “그림이 정말 크다면 어떠할지, 그런 바람을 담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2 하지만 “큰 작업”은 《취미관》의 케이스 안에서는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그림이 커지는 대신, 작가 자신이 줄어든다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유사-화이트 큐브적 모형 속에 놓인 작은, 그러나 큰, 그림을 보는 일, 그리고 그 주변 귀퉁이에서 뻣뻣하게 서있는 작가 자신의 피규어를 보는 일은, 웃기고 슬픈 한편 웃기지도 않는데, 이처럼 호상근은 《취미관》이 강요하는 스케일의 문제를 이상한 멜랑코리아를 도입하는 것으로 빗겨나간다.
(사진 출처: 직접 촬영)
돌출 조각-1,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96750293033734144)
허나 2018-19년의 《취미관》에서, 주가 되는 매체를 꼽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조각이었다. ‘그 어떤 것’이라는 명명과 잘 어울리는 모습의 소박한 입체에서 보다 조각적인 형상을 갖는 것까지, 취미관의 케이스에서 입체성을 갖는 조형은 제일 활발한 모습이었다. 개 중 하나로 곽인탄의 작업이 있었는데, 작가가 조형한 <유니크 페이스-1>, <유니크 페이스-2>, 그리고 <발-붓>은 제작 과정에서 파생된 잔여물을 조형 안으로 포괄하면서 미완결된 상황을 완결하고, 도구를 재료화한 조각이었다. 위의 세 작업에서 진행되는 재료 실험이 과정을 결과로 포함하는 성격을 갖는다면, <돌출 조각-1>에서의 재료 실험은 성격이 조금 다른데, 이것은 하종현의 ‘접합’ 연작을 방법론 차원에서 참조한 것으로, 과거의 회화 실험에서 물감을 대상으로 실험된 재료의 물성 탐구를 조각적 방법으로 재연해 매체성을 혼합하고 나아가 시간을 뒤섞는다. 또 돈선필은 ‘끽태점(喫態店, Kitsutaiten)’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참여했는데, 그것은 《취미관》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했다. 돈선필의 ‘끽태점’은 로고가 새겨진 컵이나 중고품을 출품하는 등, 작가처럼 행동하기보단 플랫폼처럼 행동했다.
두번째 《취미관》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시각적으로 꽤 복잡했고, 층위 역시 다양했으며, 결과적으로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132명(팀)이 참여한 비엔날레 같은 게 있다고 했을 때, 거기 전시된 수많은 작업 중 몇 개의 작업이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 《취미관》은 압축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사고, ‘작품이 더 작을수록 단점 역시 작아질 수 있다’는 스케일의 문제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관람은 꽤 즐거워진다. 다만 여기서 마음 놓고 응원하기 힘든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취미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다시 ‘굿즈’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서, (반지하의) ‘굿즈’는 (반지하가 그렇듯) 연습과 같은 걸 하는 듯 보였다. 그 연습의 시공간은 특별해서, ‘굿즈’는 ‘베타 테스트’ 기간 동안 판매되는 굿즈의 수익을 작가들에게 100% 분배하기도 했었다. 3 그러나 연습은 반지하가 운영을 종료하면서 함께 종료됐고, 취미가의 분배율은, 자세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제 100%는 아닐 것이다. 연습이 끝난 뒤, ‘굿즈’는 《굿-즈》가 되었고 반지하는 취미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이제 공간은 “제도의 게임” 안에서 씨름한다. “제도의 게임”이라는 표현은 강정석이 제작한 『MAGAZINE beta 1』에 수록된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등장한 것인데, 이 글에서 강정석은 신생공간-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시점을 ‘개인’의 것으로 전환해 “’미술계의 캐릭터’”가 되었을 때, 제도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시간”을 겪게 되는 상황에 대해 쓴다. 1년짜리 시간, 부족한 예산, 벗어날 수 없는 공간, 개인의 시간을 잡아먹는 갖은 잡무들, 그리고 이 안에서 작동하는 합리성. 포스트-신생공간의 몇몇 상황은 이것들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그 안에서의 최선을 찾는다.
최선을 위한 이 탐색 안에서 공간은 어렵고 중요한 주제로 끝끝내 (재)등장한다. 여전히 부동산을 이길 수 없는 신생공간-공간들은 최선을 찾아 최적화를 시도하는데, 개 중에선 특히 《PACK》의 경우가 극적이다. 《PACK》의 완벽한 작은 케이스는 전시될 작품을 위해서 거의 가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뮤지엄 컨디션’을 구현한다. 《PACK》의 케이스 안에서 신생공간-공간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함은 완화되고, 해소된다. 여전히 스케일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냐고? 2018년에 열렸던 2번째 《PACK》의 부제는 ‘팅커벨의 여정’이었다. 《PACK》은 완벽한 큐브 속에서 적절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작품의 스케일을 긍정하기 위해 시선의 주체를 줄여버린다. 그리고 거부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디즈니적 껍데기를 권유한다. 《PACK》에서 작은 작품을 들여다보고 관심 갖는 개인은 서울의… 가난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요정이다. 팅커벨 스케일의 개인은 휴먼 스케일을 극복한다. 이렇게 가상적 시점은 탈출구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취미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PACK2018:팅커벨의 여정》 트레일러, 윤태웅(NNK) 제작
(https://pack2018.org/)
권시우는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가 실재하지 않는 원본을 지지체 삼아 망상적 작업을 현실화하는 실험장이었듯, 굿즈 역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글에서, 권시우는 “굿즈로서의 작업”과 “미니어처로 제작됐을 뿐 굿즈는 아닌 작업”을 구분한다. 나아가 그는 굿즈를 작가가 전개하는 작업적 세계관의 일부로 기능하는 형식적 단위라고 전제한 뒤, “팬시한 상품의 이미지”로부터 굿즈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결국 개별 작업을 통하여 형식화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본” 작업에 비해 자원과 시간을 덜 소모할 수 있는 굿즈형 작업을 통해, 작가 개인은 스스로 구축한 형식 및 작업적 세계관을 분절하여 관리할 수 있고, ‘포스트-굿즈’의 이와 같은 “유연”함을 적절히 활용하며 작가는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 4 5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의 가상적 상황을 물렁한 채로 내버려두지 말고,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상적 상황이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는, 강정석이 말한 것처럼, 이 물렁한 시/공간이 이제 “제도적 게임”과 연관됐기 때문이다. 제도는 상황을 자신에 맞춰 재구성한다. 제도의 이런 강제력이 부여하는 상황은 심지어 미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신생공간이 아직 “가변적 시간”(강정석) 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작가에게 수익을 무슨 100%를 줘버리는 말도 안 되는 아마추어적 시간이었을 때, 신생공간적 상황은 전염성을 가졌다. 지금에서야 사람들이 전부 ‘신생공간 작업들 그때 봤어도 완전 다 허접하고 말도 안 됐다’라고 얘기하지만, 기존의 미술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미술로서 신생공간이 지닌 특별함이 존재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괜히 다들 어깨를 으쓱하긴 하지만 그러는 당신도 한진의 그림 같은 것을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생공간적 상황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으로 전환된 이후, 이처럼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광경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도는 이 전염성, 어떤 동질감을 휘발시킨다; 신생공간적 상황 역시 기존의 미술과 작동방식이 동일해진다. 응원도 후원도 없는 곳에서 가변적 시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권시우의 의견은 이런 상황을 의식한다. 물렁물렁한 시간이 끝나면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미술 안에 정착하는 게 맞는데, ‘기존의 미술’뿐 아니라 ‘그것이 아닌 미술’을 관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로서 작업은 제도가 강제하는 재구성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반자율적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렁한 상황이 단단하게 된 상황에 맞춰 자신과 그 주변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의견으로 ‘작업을 하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지난 시간을 잘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또한 가능하다. 신생공간이 활발하던 시기, 정리에 대한 강박은 이미 그 주변에 가득했다. 목적은 다양했다. 이 유동적인 상황을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단순하게 이것이 싫어서 폄하하기 위해서, 또는 다음주까지 써야 하는 원고 마감을 위해서. 그렇지만 아직 그럴듯한 이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최소 극대화의 게임」에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도표를 제공한다.
도표에서, 신생공간은 포스트-굿즈를 바라보지만, 포스트-굿즈는 신생공간을 바라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과 ‘이후’의 시점은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최소 극대화의 게임」은 아래를 바라보는 ‘이전’의 시선을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요약한다.
“90년대생이 준비한 것이 많을 텐데, 올해 사람들이 모여서 큰 행사를 하고 하니 가려진 부분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더 드러나게 되겠죠.” 6
그렇다면 90년대생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가 기입된 애매한 위상의 폐허를 다시 플레이보드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 주지하듯 한번 유예된 시간은 지속할 수 없다.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7
권시우와 윤태웅(NNK)이 기획한 전시 《호버링》은, 윤태웅이 우연히 전시를 하나 기획하게 되며 탄생했다. 윤태웅은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전시하고, 연결”하는 플랫폼인 90APT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자연히 전시는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또 “연결”하는 기획이 되었다. 전시를 구체화하면서 윤태웅은 권시우를 공동 기획으로 섭외했는데, 당시 권시우가 신생공간 ‘이후’에 가능한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전시를 하게 된 공간이 이전에 커먼센터였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흘러 흘러 기획은 ‘90년대생 작업자는 + 신생공간이라는 소유자 불명의 영토에서 =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마주치게 됐다. 전시 서문을 통해 권시우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호출하면서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신생공간적 상황을 재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을 (비)익명의 자본으로 전제하고 전유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생공간을 전유하려던 《호버링》의 기획은 어떤 논의를 불러일으켰을까? 신생공간을 소유자 없는 땅으로 간주하고 강탈을 시도하려던 “90년대생 작업자”들의 기획은 무엇으로 간주됐을까? 허나 놀랍(지 않)게도, 《호버링》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고 시간이 지난 뒤, 권시우는 트위터를 통해 “80년대생 미술계 종사자”를 겨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이후 세대에게 당신들의 경험치를 배분해줄 의향이 있습니까? 신생공간이 씬이 아니었다고, 그건 단순히 외부의 필요에 의한 호명이었다고 거듭 부정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상생하고 있는 당신의 ‘동료’들은 무엇입니까? (…) 어차피 당신이 이후 세대에게 기여할 의향이 없다면, 90들이 판을 어떻게 깔든 무슨 상관인가?” 8
《호버링》은 신생공간이라는 맥락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전시’가 될 수는 없었다. 권시우와 윤태웅이 《호버링》을 통해 만들어내고 싶었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긍정적인 형태의 순환이었을 것이다. 더 많은 논란과 더 많은 이야기들, 또 더 많은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이 꼬리를 물며 돌아갈 때 다시 풍부해질 미적 상황들. 허나 벌어져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시점은 어긋났으며, 블랙박스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후’는 정말 어디에도 없었던 것일까? 《굿-즈》가 막을 내린 뒤, 많은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단번에 죽어버리지는 못했으므로, ‘이후’가 존재했다. 그것은 (이하 무순) 소쇼룸(soshowroom)의 가변적인, 그러나 협업적인 공간에 존재했고, 기고자와 원룸에도 존재했다. 신생공간적 상황은 대개 가상적 공간성을 과장하여 현실화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공간적 조건을 분할하여 분산하려 했던 이런 저런 시도 속에도 ‘이후’가 존재했다. 오페라 코스트나 웨스트웨어하우스, 또 행사를 세 개로 쪼개 각자 다른 세 공간에서 선보였던 첫번째 《PACK》 등. 또한 ‘이후’는 2번째 《PACK》에서 윤태웅이 협업 기획으로 참여, 참여 작가 중 “90년대생 작업자”의 비율을 늘렸을 때, 그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최하늘이 자신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를 문주혜의 개인전 《Shuffle The Deck》 위로 겹쳐버렸을 때, 회화적 상황과 조각적 상황을 서로 독립된 상태로 중첩시켜, 하나의 덩어리로 조감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분산된 것이 아니라) 완결된 상태로 제시했을 때, 그것은 신생공간 미술의 공간성을 극복하려는 나름의 방법으로 보였다. 또 박보마와 송민정이, (어쩌면 장다해가) 빈곤을 미학화하려는 신생공간 미술의 어떤 기제를 초-장식적 경험으로 환원하려고 무언가 했을 때, 거기에도 ‘이후’는 존재했다. 《서울 바벨》에서, 《유령팔》에서, 또 《호버링》에서, ‘이후’는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 ‘이후’에서 시도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유동하던 가변적 시간이 지나간 뒤, 신생공간이라는 흐름에 대해 제도가 자원을 투자해 연구하고,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가 기획되며, 그 결과에 대부분이 만족하고, 그로부터 누군가는 배움을 얻고 또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며, 그것이 미적으로 구현되고, 거기에 모두가 영감을 얻어 더욱 진보된 의제를 펼치며 제도는 이 선순환 구조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후원한다는 미래. 모르긴 몰라도 이 미래가 도착했다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지금과 무척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강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방안에 앉아 계속해서 상위 시점을 더듬어가면 한국 사회 전반이나, 그보다 상위 시점의 게임까지 막연히 상상하며 붕 떠버릴 수도 있다.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전체 그림을 한 번에 잡을 필요는 없다. 되려 천천히 관찰해야 한다. 사회 속엔 다양한 캐릭터가 루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상황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제도의 게임”에 참여한 개인은 제도의 속도에 사로잡히고, 제도가 제공하는 환경에 바쁘게 반응하는 동안 ‘이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여유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은 땅에 발을 붙이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이즈로 해야 한다. 이것은 타당하지만, 그렇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완전한 주변의 시간으로, 연습적 시간으로.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나는 《취미관》이 전적으로 시간을 마련하는 플랫폼이라고 썼다. 9 시간을 선형적으로 거치며 생겨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취미관》이 외연을 보다 넓히기 위해 《굿-즈》라는 자산을 변형하며 버티기 시작했을 때,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 18-19의 《취미관》은 보다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게 된 듯 하다. 참여 작가는 100여명(팀)을 넘었고, 기간은 대폭 늘어났으며, 외연 역시 어느 정도 늘어났다. (IAB 스튜디오와 콜라보레이션한 후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품절되었는지, 취미가의 SNS 계정을 팔로우해둔 사람은 보았을 것이다.) 2019년 현재, 드디어 ‘작음’을 긍정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만들어졌다 – 그러니까 《취미관》은 이제, “단지 너무 무겁지 않게 약간의 짐을 나누어 지는 자리”가 되어, “작은 것은 작은 우회와 작은 교차의 기회를 제공한다.” 10
어쩌면 이것 역시 시간이라는 단순한 힘에 의한 결과다. 허나 시간의 선형적 힘은 공평해서, 그것은 취미가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힘은 굿즈에도 역시 똑같이 작용했다; 굿즈를 위한 시공간은 이제 너무나도 많아서, 《취미관》이라는 맥락은 이제 볼 만한 아트샵 중 하나 정도로 단순해졌다. 굿즈는 나눌 만한 자원이자 괜찮은 아이템으로서 더 유연하고 더 광범위하게 변모를 거듭하고, 그 결과 급속도로 지루해졌다.
취미가에게는 비전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를 통해 서울의 미술에서 가장 크게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11 이 이야기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에서 취미가가 찾은 답안 중 하나이고, 동시에 생존이라는 지긋지긋한 주제를 위한 미술의 고민이다. 이것은 중요한 목표라서, 취미가는 이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서 시간을 더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 허나 그러는 동안, 취미가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공간은 작은-기성적-공간이 된다. 대관료를 받고 전시를 유지하는 공간이 되었고, 아트샵도 페어도 아닌 것을 다섯 달 동안 회전시키는 무의미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접혀버린 신생의 시간 위에서 취미가는 기성도, 신생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구축한 최선의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취미관》은 어떠한 형태를 갖추게 될까? 혹시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것은 기금 마련을 위한 디너쇼 같은 것처럼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허나 아직 《취미관》은 끝나지 않았고, 케이스 속 출품작들은 꾸준히 변동될 예정이다. 나는 아직 《취미관》을 전부 본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부분적인 이야기만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취미관》은 여전히 유예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고, 여전히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 안에서, 《취미관》은 여전히 최선의 결과물인데, 이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 『Painter by Painters』, 김혜원 인터뷰, 110p [본문으로]
- 《PACK2018:팅커벨의 여정》 웹페이지 작품 설명 참조. https://pack2018.org/W [본문으로]
- 굿-즈 트위터 페이지 참조, https://twitter.com/g8dsinfo/status/510673519617638400 [본문으로]
- 권시우, 「취미가와 취미관 이후의 ‘굿즈’」,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7?category=650941 [본문으로]
- 권시우,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미술세계』 2016년 12월호 제50권, 91-93p,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본문으로]
- 강정석,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 『MAGAZINE beta 1』, 201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권시우, 「《호버링Hovering》 전시 서문」, 2018,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 권시우 a.k.a. “흔들렸던 죠” 트위터.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https://twitter.com/shakingjoe/status/1003575837189238785 [본문으로]
- 황재민,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을 향한 에세이」,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8 [본문으로]
- 윤원화, 「캐비닛의 ‘작은 미술’: 굿즈, 생산-전시-소비를 말하다」, 『아트인컬처』 2019년 2월호, 126-129p. [본문으로]
- 권순우, “(…)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감상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을 지급해서 일정 부분 작가를 후원하게 되는··· 씬에 명확하게 포함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번 그걸 해본 것은 한 번도 안 해본 것이랑은 엄청난 차이죠.”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https://pia-after.com/?p=60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