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사용자 안내서

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jipdanochan 2016. 3. 2. 13:32

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현재라는 시점을 가까스로 설정해보자. 그것은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아카이브에 축적된 무분별한 과거의 잔상들의 총합이 아니다. 현재에 나름의 윤곽을 부여하기 위해 그러한 정보량을 모조리 동원하는 순간 정작 포착될 수 있는 것은 개개의 정보값을 잃은 채 서로 중첩되거나 그럼으로써 파열되는 수열적인 이미지들의 불협화음 자체일 것이다. 엇비슷한 맥락에서 또 하나의 망상을 거듭해보면, 웹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단번에 조감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이란 걸 가상 차원에서나마 탑재한 채 우리가 목격할 수 있다고 짐작되는 풍경의 밑그림 또한 아마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일한 포맷을 전제하는 웹사이트들의 연속체에 온갖 어플리케이션들이 링크됨으로써 마침내 웹2.0이 도입되고, 국내 시점으로 2009년 말부터 아이폰3GS가 상용화됨으로써 이러한 링크들이 보다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 상에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느덧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수사를 앞지르며 그로부터 파생된 미디어 컨텐트들을 순전히 일상 차원에서 일별하는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또한 휴대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제 관성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깝다. 결국 보다 직접적으로 상기할 수 있는 현재란 딱히 과거라는 특정 시기와 대질할 필요가 없는, 애초에 출처가 희석돼버린 정보-이미지들을 앞선 환경을 토대로 의 편의에 따라 동기화시킨 일시성의 감각에 근거한다.

 

최근 미술계에서 생산되는 일련의 작업들은 그런 맥락에서의 현재성을 공유한다. 이때의 현재성이란 주지하듯 구체적인 시간의 궤적이라기보다 지금의 시점에서 모종의 이미지들을 작업의 재료로써 취한다고 할 때 작가 이전에 사용자로써 자연스레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전제조건에서 비롯한다. 결국 관건은 이러한 경험 자체를 나름의 방식으로 가시화해내는 방식, 혹은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추동에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김정태가 반지하에서 진행한 현피프로젝트에서 하나의 벽면을 유사 프레임 삼아 그간 자신이 축적한 드로잉 기반의 작업들을 그 안에 무분별하게 배치했을 때 프레임 내부에서 분산되는 소실점은 단순히 패치워크의 눈금선 따위로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이미지를 어떻게든 현실 차원에서 재현시키기 위한 모종의 방향성으로 작용하게 된다(혹은 작가 본인이 그것을 의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김정태가 일시적으로 점유한 공간이 결코 OS가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프레임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실상 여러 개 유닛의 동시 실행이라는 하이퍼스레딩의 다소 피상적인 면모만을 빌려와 즉각적으로 대입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제목이 암시하듯, ‘현피는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구동되는 복합적인 명령어가 대뜸 가상이라는 레이어를 던져버린 채 별다른 매개 없이 현실에 저돌적으로 출몰했을 때 어떤 식으로 무효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다. 김정태는 현피이후에 지속적으로 이러한 프레임의 확장판을 모색하는 듯하다. 이제 개별 작업들은 <오토세이브>의 경우에서처럼 웹상에서 수집된 이미지 자체를 임포트하여 자율연상적인 필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한층 배가된 속도감을 선취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현실에 접속되는 순간 굳어버린다는 전제 하에 파본들의 물량으로 동기화된 채, 프레임 내부에 (물리적으로) 대거 동원된다.


김정태, <현피(現實+playerkill)>, 2014. (http://gimjeongtae.tumblr.com/)

 

박아람과 협업한 ‘100 1000 10000’1)에 이르면 파본은 마침내 이미지로써의 지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박아람이 포토샵의 자석 올가미 툴을 이용해 디지털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측량한 단위체인 운석들의 형상은, 앞선 6분 남짓의 영상에 동원된 온갖 클립들과 지속적으로 중첩되고 또한 픽셀 단위로 일그러지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유기체적인 루프를 구성한다. 애초에 운석들에 사용된 자석 올가미 툴은 특유의 자동화된 우연성으로 인해 크롭의 대상인 이미지의 본래적 속성으로부터 번번이 이탈하며 그러한 행위가 반복될수록 실상 출처라는 개념은 무용해진다. 결국 ‘100 1000 10000’은 이처럼 오로지 결과값만이 존재하는 일련의 형상들의 역추적할 수 없는 경로를 타임라인 상에서 재연하는 셈이다. 어찌됐든 동일한 타임라인 상에 위치한 클립들은 간혹 실사 이미지와 웹 페이지 링크 등의 면모를 노출하지만, 개별 운석과 마찬가지로 그저 루프를 이루는 불가해한 표면으로써만 존재할 뿐 어떠한 방식으로도 온전히 독해될 수 없다. 역으로 김정태의 시점에서 본 작업을 일별할 때 이는 결국 물량 자체가 무효한, 동시에 그럼으로써만 현실에서 재연되는 일종의 형해화된 하이퍼링크나 다름없다.


1) 박아람 x 김정태, <100 1000 10000>, 2015. https://vimeo.com/149115168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처럼 포스트 인터넷세대라고 투박하게나마 호명할 수 있을 일군의 작가들은 각자가 체득한 웹상에서의 경험치 자체를 이미지로써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터페이스를 차용한다. 박아람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자석 올가미 툴을 사용한다고 할 때, 엄밀히 말해 그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측량의 도구라기보다 웹 이미지가 전제하는 수열성을 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수행할 수 있는 규칙들로 환원하기 위한 일종의 좌표 설정에 가깝다. 이를 방증하듯 자석 올가미 툴연작은 어찌됐든 측량된 결과인 출처 불명의 윤곽선을 템플레이트 삼아 그것을 반복적으로 드로잉하거나 운석들의 경우 윤곽 자체를 3d프린터로 부조해내는 식으로 다소 직접적인 매체 간 번역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경험치 자체는 반드시 특정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포스트 인터넷의 자장 안에서 동기화된 각종 소프트웨어 미디엄을 활용하는 감각 자체에 대한 형상화 기제가 현실에서 번안된 이미지로 귀결될 뿐이다.


박아람, <Magnetic Lasso Survey>, print and highlighter on drafting paper, each 56x99cm, 2012 (April). / 

박아람, <운석들>, 3d 프린트, 가변크기, 2015.

(http://rahmparc.tumblr.com/)


우리는 대략 이러한 파편적인 얼개의 이미지 서사 한 가운데에 있다. 혹은 그 근저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다소 편의적으로 수렴하고 그러한 표층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점멸하는 가운데 때때로 상호 교차하며 우연찮은 궤적을 그린다. 이때 서사란 하부구조로부터 단단히 쌓아올린 공통의 역사적 블록들이 아니라 표층 이면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상정한 채 다소 조건반사적으로 구술되는 방언에 가깝다. 인터페이스는 일종의 유리벽인 동시에 바로 그러한 차단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그것을 비로소 작동시킨다. 반드시 논리적인 추론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인터페이스로부터 난반사된 표층의 언어들은 그 자체로 운동성을 지니며 포스트 인터넷을 어렴풋이 체감한 작가들은 이제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재차 유사 이미지를 가공해낸다. 그러나 여전히 유사라는 접두어는 착란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를테면 방언들의 우연적인 집합이 최소 단위의 서사를 이룬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을 블록 삼아 현실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김정태와 박아람이 바로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채, 서사 이전의 이미지 블록만으로 현실계에서 다소 자폐적인 방식의 규칙들을 조형해나간다면 그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서사 자체에 주목하는 일련의 전략들이 존재한다. 김희천의 바벨 3부작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매우 사적인 내러티브를 빌어 현실을 극적으로 증강시키고 덕분에 일련의 영상들에서 묘사되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마치 데이터로 포화될 것만 같은 유사디스토피아로 표변한다. 이를테면 서두격인 바벨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익명의 개인은 하나의 유닛으로써 GPS의 경로에 따라 구글 맵상을 활보하고 그러는 와중에 점차 평면상에서 유실되는 데이터의 흔적들은 실상 그의 실존을 역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써 주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은 점차 공간의 외연으로 확장되며 종내엔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달리 말해 웹 지도의 평면성으로부터 고스란히 3d로 복각된 서울은 GPS유닛의 시점에서 비롯한 뷰잉viewing이다.

 

영상 내내 라고 호명되는 누군가에게 파국의 심정을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화자의 내레이션은 이 모든 텅 빈 장면들에 세기말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랜더링된 서울 모형을 실제와 혼동할 수 있을 만한 이입의 시점을 부여한다. GPS유닛의 익명성은 그것이 상정하고 있는 데이터의 부호화와 별개로 바벨의 사적인 층위들과 연루되며 (적어도 러닝타임 내에서) 모두를 관통할 수 있는 극적 장치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한 서사적 흐름에 의해 탈각된 도시의 잔해들은 이어지는 ‘Soulseek/Pegging/Air-twerkging’에서 서사의 구심을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채 3D좌표 상에서 무작위로 재배치되거나 때로는 불필요한 덩어리로써 군집하며 철저히 도구화된 성격을 드러낸다. 결국 바벨이 유도하는 착시란 실제 도시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증언이 아니라 도시에 관한 인터페이스 경험이 개인에 의해 온전히 통제될 수 없을 때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길함을 시각적으로 재연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도시의 인프라는 데이터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구글 맵과는 다른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실존한다. 3부작의 대단원인 랠리에서 김희천은 실제 도심을 가로지르며 재차 죽음과 연루된 파국의 정서를 유리 파사드에 투사하지만 그로부터 난반사되는 이미지들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구체적인 현실을 포착한 결과가 아니라,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 속으로 이입되는 방언에 가까운 내레이션들이 불러일으킨 주술적 효과에 가깝다. 달리 말해 랠리가 최종적으로 120층 남짓의 롯데월드 타워의 고점에 도달했을 때 체감되는 수직성은 그러한 텍스트-몽타주를 발판으로 삼는다. 그 외에 이미지를 지시하는 구체적인 패러미터는 부재한다. 즉 우리는 여전히 내레이션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어휘를 빌려야만 데이터로 포화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달리 말해 아직 미처 증강되지 못한 포스트 인터넷 환경에 상주하고 있는 셈이다. 바벨 3부작이 반복적으로 불시착하는 죽음의 무게감은 랠리에 이르러서 끝내 농담으로 얼버무린 모호한 눈금 선을 가리킨다. 데이터 세계에서의 죽음은 결코 표층을 꿰뚫지 못한다. 현실에서 미처 애도하기도 전에 다시 수열성의 흐름 속으로 통합될 뿐이다.


김희천, <랠리 Wall Rally Drill> , 2015, 싱글채널비디오, 32m.(http://heecheon-kim.tumblr.com/)

 

이러한 논의는 재차 프레임이라는 원형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김정태가 현피<오토세이브>에서 하이퍼-이미지를 현실에 재연하기 위해 각각의 요소들을 격자 단위로 재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전체 화면을 구성했다면 김희천은 영상의 최소 단위로써의 프레임을 3d모델링의 세계에 투사하는 식으로 가상의 시점을 확보한다. 양자는 시간을 일종의 선형적인 연속체로써 전제한 채 이를테면 과거 사진이라는 매체가 그러했듯 대상을 향해 셔터를 누름으로써 인위적으로 정지시킨, 혹은 그럼으로써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시각적 기호를 추출하는 식으로 디지털 세계를 대질한다. 그에 대한 결과란 바로 일련의 작업들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한 프레임으로써의 잔영이다. 그러나 앞서 설정한 현재 시제와 마찬가지로 포스트 인터넷 환경이란 본질적으로 표층 이면에 축적된 과거를 스킨의 양태로 포화시키고 종내엔 모더니즘적인 시간성 자체를 불협화음으로 꼬아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표층 이후의 시공간을 여전히 프레임으로 온전히 포착 내지는 호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때 발현되는 정지의 순간이란 결국 우리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혼종화된 이미지 덩어리거나 프레임이란 단위를 투과하며 원근법적으로 압축된, 실상 데이터와는 무관해 보이는 단출한 장면이다. 이때 우리는 다소 섣부르게 상정된 포스트 인터넷의 세계상과 마주친다. 그간 축적한 웹상에서의 경험치, 혹은 이를 기반으로 한 인터페이스 감각은 이처럼 미처 도달하지 못한 현실의 지점을 어떻게든 와 맞닿은 시계視界로 끌어당겨 중첩시키려 한다. 이러한 추동을 설명하기 위해 과연 어떤 사족들을 덧붙여야 할까. 앞선 경험치의 맥락에서, 이미지 요소들을 즉각적으로 변용하고 동시에 유통시키는 이른바 짤방의 속도감은 매번 사용자의 감각 차원을 헛돈다. 이러한 잔여의 전류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현실에서 증폭시킬 마땅한 대체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의 괴리를 만회하기 위해 다소 인위적인 속도의 이미지를 가교로써 배열한다. ‘바벨의 언어를 빌자면 세계는 어쩐지 불길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 정체가 무엇이건, 이제는 에게 익숙한 방언들로 구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군의 작가들은 더 이상 수열성이 지배하지 않는 현실계에서 물성을 지닌 채 굳어버린 디지털 화석을 작업의 재료삼아 순전히 의 감각에 기반한 유희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다중적인 소프트웨어 환경과 동기화된 일시성의 감각이라기보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무수한 분기들 중에서 다소 편의적으로 선택된 단 하나의 결과값일 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수사와 어느 정도의 근사치를 구성한다. 이미 추출된 디지털 화석들은 이면의 논리와 단절된 채 그 자리에 불시착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지극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달리 말해 사용자 친화적으로 규정된 채 앞으로의 궤적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인터넷을 둘러싼 현재의 윤곽을 임의적으로 붙들고 있는 관성이다. 인터페이스 감각은 현실의 시점을 교란하며 은연중에 사잇공간을 열어놓지만, 우리는 그 너머에서 여전히 불시착한 운석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단지 데굴데굴구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프레임 내부에서 불완전하게 감속됐을 때, 바로 그러한 불안정함으로 말미암아 역으로 포스트 인터넷과 실제 현실이 서로를 간섭하는 이종의 전류를 엿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