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사용자 안내서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jipdanochan 2016. 12. 23. 02:05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0) 노상호 개인전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시작. 다소 이상한 청탁을 받은 관계로, 오늘 12일부터 본 전시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이나 그로부터 비롯한 두서없는 망상들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노상호의 삽화들은 개별성을 띄기보다, 단지 공간적으로 확장되기 위해 습관적으로 파생된다. 이러한 작업 환경을 과도하게 줌아웃해보면 개개의 삽화는 나름의 정보값을 지니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한 채 망점의 일부로 수렴한다.

 

2) 그런 의미에서 삽화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 배경을 지니지만, 이를 링크삼아 변별적인 서사들에 일일이 접속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무용하다. 뒤이은 의문은, 애초에 삽화라는 형식은 그와 병행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재현할 수 있는 구조인가?

 

3) 삽화는 이야기를 트레이싱하기보다 이미지를 통해 추상화한 불완전한 단면만을 제공한다. 이는 어쩌면 비유적 의미에서의 망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적인 화면의 밀도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로써 충분히 가볍기 때문이다.

 

4) 이처럼 줌/아웃을 넘나들며 서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제야말로, 이미지로 포화한 세계에서 굳이 이야기꾼을 자처한 이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난점인 셈이다.

 

5) 전시 현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일련의 삽화들은 각종 진열대에 품번이 매겨진 채 정렬되어있다. 과연 모든 이미지를 수렴하여 노상호에 대한 명확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그런 행동은 무의미할뿐더러 불가능하다.

 

6) 인간은 스캐너가 아니며, 애초에 스캐너 또한 이미지를 열화 저장할 뿐 독해 장치가 아니다. <THE GREAT CHAPBOOK>에 진열/집적된 무수한 삽화들은 단지 시각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소비가 거듭될수록, 망상의 폭은 일시적으로 확장된다.

 

7) 이때 망상의 폭은 마치 각자가 무작위로 일별한 이미지 재료를 나름대로 취합할 수 있는 일종의 레이아웃을 연상케 하지만, 그것이 망상인 한 레이아웃처럼 정교하게 작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재료 이전에 거듭 형해화된다.

 

8) 노상호가 메르헨으로 호명하는 불특정한 이야기들에 반응하며 조건반사적으로 그려낸 삽화들은 특정 서사의 링크로 작용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미지 소비만을 유도하며 정작 링크를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9) 서사와 매개된 링크의 절단면만이 남았을 때, 삽화는 자신의 출처 없음에 대한 외상을 일종의 자기반복성으로 벌충하려한다. 혹은 서사의 깊이감에 대한 소실점이 와해되며 단지 이미지들의 유한한 표면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10) 삽화와 병행하는 일련의 텍스트(http://thegreatchapbook.com/)가 삽화의 오래된 전사인지, 이미 전사를 잃어버린 삽화에 사후적으로 덧붙인 사족인지 불분명해진다. 문제는 메르헨자체가 이미 사족들의 난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1) 그러므로 노상호는 사실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출처 없음의 삽화들에 부합할 법한 픽션을 전개하기 위해 메르헨으로 총칭되는 각종 설화, 경험담, 풍문 등을 수집 나열한다는 역전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12) 삽화라는 형식은 이미지가 서사성과 맺은 일종의 협약이다. 마침내 그것이 무효한 시점에서 삽화의 잔여만을 토대로 삼는 픽션을 납득할 수 있을까? 이제껏 파생된 의사-삽화들이 구성하는 표면적을 픽션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13) <THE GREAT CHAPBOOK>에는 삽화와 (텍스트로 기술되는) 픽션이라는 두 개의 시공이 공존하며, 전자는 후자를 앞지르며 서사가 남긴 추상적인 자재들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단절된이미지들의 총량은 여전히 가볍다.

 

14) 1)에서의 망점의 비유는 유효한가? 노상호는 데이터베이스 기계가 아니므로 개별 이미지들을 망점으로 흐리는 정도의 방대한 표면적을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개별성은 여전히 전체상의 밀도 속에서 와해된다.

 

15) 노상호는 지난 <굿->에서 지형과 지물을 비롯한 삽화 속 객체들이 무분별하게 산개한 걸개그림의 일부를 잘라서 관객에게 판매했다. 이제 삽화는 서사의 반영에서 벗어나, 단지 무작위로 크롭됨으로써 하나의 장면으로 성립한다.

 

16) 5)에서 언급한 진열대의 풍경 한편에는, 시야를 압도하는 배율의 걸개그림들이 짧은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나열돼있다. 그 중 하나는 <굿->에서 판매된 그것인 듯, 잘려나간 일부를 방치하거나 재차 드로잉으로 기운 모양새다.

 

17) 사잇공간에서 대면한 걸개그림은 결코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 관객은 단지 제한된 시선의 범위를 옮겨 다니며 삽화의 일부들을 마찬가지로 크롭해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는 작가가 제 세계관을 오려 붙이며 2차 창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18) 노상호는 삽화가 지니는 양가성이 분기하는 임의의 장소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미지와 픽션은 각자의 분기 속에서 파생한 객체들을 느슨하게 직조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삽화라는 분기점을 의식한 채 주저하며 자기완결성을 지니지 못한다.

 

19) 이는 열린 공간이라기보다 별다른 체계 없이 열거된 썸네일의 파편들 같다. 전시장의 이미지들은 때로 각기 다른 배율로 확대 축소된 채 종이의 질감에서 벗어나 디지털 프린트되거나 공간의 면면에 설치되지만, 결코 한 데 증척되지는 못한다.

 

20) 그 결과 주어진 것은 일종의 가설무대다. 그러나 무언가 상연되기를 예비하기보다, 아무런 서사도 되비치지 못하는 불투명한 삽화들의 항구적인 대기상태만이 남아있다. 관객은 그 사이를 거닐고, 일별하고, 무엇보다 크롭한다.

 

21) 이로써 표면적을 배회하는 시선은 일시적인 공간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다른 한편에서 이야기꾼은 여전히 무용한 독백을 계속하고 있다. 그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THE GREAT CHAPBOOK>이 보유한 이미지들의 재단선이다.

 

22) 릴레이 텍스트는 여기까지입니다. 웨스트웨어하우스도 전시와 함께 오늘부로 막을 내리게 됐네요. 간혹 발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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