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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시간들이여, 시간은 없구나>

jipdanochan 2017. 8. 6. 17:35

<오 시간들이여, 시간은 없구나>

 

이양헌

 

*퍼블릭아트 2017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오 친구들이여친구는 없구나> 전시 전경

 

2009옥토버(October)가을 호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현대미술을 전공하는 구미지역의 다수의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에게 동시대성’(The contemporary)에 관한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랜트 캐스터(Grant Kester), 권미원(Miwon Kwon),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 등이 참여한 이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상황을 예술실천과 이론이 봉착한 일종의 교착상태로 상정하고 있으며, ‘동시대미술이 가지는 범주의 역설에 주목하였다. 동시대성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역사적 규정이나 개념적 정의, 비평적 기준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론화되지 않는 핵심적인 가치로서 오늘날 미술계 구석구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성, 나아가 동시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현재’(The present)라는 시간 축으로 군집화 된,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지고 있거나 오늘날 제작된 모든 미술을 배제 없이 포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새롭고 최신의 것인 동시에 지금여기(Nowhere)와 시차 없이 조율된 시간성에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동시대성을 선취하려는 열망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는 젊은작가들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깊어지는 열병, ‘최신예술담론을 향한 이론가들의 강박, 무엇보다 가장 동시대적인것과 공명하려는 제도권의 욕망으로 두드러진다. 이제 막 문을 연 포스트-신생공간부터 가장 보수적인 국립기관까지 컨템포러리(Contemporary)한 자장 안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브랜드 헤리티지를 통해 주요 제도권의 위치를 선점한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호명한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6년 개관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는 김민애, 김윤하, 김희천, 박길종, 백경호, 윤향로라는 이미 젊음혹은 신진으로 상징화된 작가 군을 불러 모아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다. 전시 서문에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작가들을 통해 각자의 현재와 대면시키고, 아직 실현되지 않는 서로의 미래로 투영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혹은 과거와 연접을 통해 미래를 산출해내는 동시대적 지금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취해야 할 동시대성은 어떤 시간인가? 작가들을 매개해 동시대적인 것에 머물거나 이를 포착해내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분절된 기표, 파편화된 텍스트가 부유하는 김민애의 <파사드>에 가로 막힌다. 불투명한 가벽으로 둘러싸인 미로는 동선을 제한하는 동시에 기입된 구문들을 독해하게 하면서 전시장과 작가 사이의 중첩된 과거사적 지층, 그 시간의 궤적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김민애가 수집한 하이퍼텍스트는 오래된 지표로 쓰여 진 이정표라는 점에서 대상이 남긴 기억과 역사를 수집해 동시대를 전사해내는 크로노스적 시간관 혹은 기념비로서의 현재와 같다.

 

이러한 시간-감각은 김윤하와 박길종, 백경호의 작품에서도 각각 발견되는데,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상을 주관의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김윤하는 당구 큐대, 대걸레, 플라스틱 의자, 테니스공 등을 비정형의 모뉴먼트(Monument)로 쌓아올려, 전시장의 10년을 경유했던 작가들을 일별해냈다. 일종의 안티-오마주로서 이 트로피들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무화시키기도 하지만 각각의 사물들은 지난 10년을 현재화하는 성좌로 기능하면서 회고를 통해 동시대에 내려앉는다. 반면, 박길종은 공간의 흔적 혹은 물성의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거나 개척해 낸 재료들의 집합은 <내 친구의 친구들은 내 친구들이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르메스를 거쳐 간 작가들의 것이면서 길종상가와 박길종 자신의 것인 동시에 시대 안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료를 참조해 현재를 번안해 내는 제작자의 시도는 과거를 불러들여 현재를 대질하려는 전시의 기획과 정확하게 포개져 있다. 무엇보다 과거를 경유해 현재에 당도하려는 시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작업은 백경호가 제시하는 다섯 명의 인물(혹은 회화)들인데, 다층의 레이어와 혼성화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것이 회화의 역사를 경유했음에도 종국에 동시대적 풍경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기념비로서의 현재를 전면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선형적 시간 속에서 가산(加算)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편, 과거의 총체로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전시장에 놓인 또 다른 시간은 현재주의(Presentism)’비동시성(Asynchronism)’이라는 상이한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소녀 변신물 애니메이션에서 에너지가 방출하는 장면을 캡처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으로 재매개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인터넷 분기 이후 세계를 인지하는 새로운 시각장의 알고리즘 혹은 열화와 초평면에 의해 지지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 사이에서 독해될 수 있지만, 특정한 순간을 이미지로 결빙해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이 유사회화는 시간의 과잉적 낭비라는 차원에서 현재주의에 연동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부정과 과거와의 거리두기에 참여하는 현재주의는 지금의 순간을 사고의 지평이자 종착지로 간주하면서 동시대의 지루한 지속을 드러내는데, 데이터가 언제나 현시적으로 실행되는 것처럼 인터넷을 통해 에르메스의 지난 10년을 대면하는 윤향로의 경험도 그 자체로 현재적인 시간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특정한 순간을 지속해 현재에 거주하는 윤향로와는 대조적으로 김희천은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동시대성에 접근하는 듯 보인다. 시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멈블>은 웹 2.0과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눈부시게 성장한 이후 도래한 동시대의 풍경 안에서 다중-시간과 유동하는 공간성에 대한 한편의 에세이필름으로 상영된다. 실재와 가상의 이중간섭이 일으킨 현기증은 VR을 착용한 맹인안내견과 기이한 꿈을 말하는 작가의 어머니를 거쳐 공사 중인 가상의 에르메스에서 를 찾아다니는 남성에게로 이어진다. 이미 사라진(혹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개를 부르는 이 남성은 증강현실 안에서 일종의 시간착오를 겪는 듯 보이는데, 마치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 빠르거나 늦게, ‘이미그리고 아직으로만 동시대를 경험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감벤이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로 동시대성을 설명하면서 그 핵심에 어떤 불일치와 단절, 시간적 파열을 상정한 것과 연결된다. 동시대를 바라보는 비동시적 관점은 1년과 7년 사이의 간극처럼 그 시차를 벌려 당대를 반시대적인 위치에서 고찰해낸다.

 

동시대성은 이렇게 균질한 선형시간이거나 정체된 현재로, 혹은 비동시적인 시간들로 우리 앞에 산재해 있다. 작가들이 발산하는 다종의 지금-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의 겹침과 이접된(disjunct) 관계에서 현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진정한 동시대성이란 복수의 시간들임을 보여준다. 다시 전시의 제목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해지는 인용구,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을 보자. 그것은 우정의 이중성과 타자의 현존을 말하지만, 가장 현재적인 시간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그 불가능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친구들을 부르듯 오직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만 온전히 조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동시대 안에서 우리는 현재를 따라잡으려는 열망 대신 과거의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사건을 매듭짓고, 미래를 비평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동시대를 정의할 수 있을까? 햄릿의 한 구절을 빌려 그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이 글에 대한 문혜진 평론가의 메타-비평이 퍼블릭아트 8월호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