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roject/[저기-거기-접때-나중에]

잠정적인 ‘저기-거기-접때-나중에’에 대한 잠정적인 메모

잠정적인 ‘저기-거기-접때-나중에’에 대한 잠정적인 메모


황재민


시대가 바뀌었다, 담론이 죽었다, 어떤 사실들은 정합성과 눈에 보이는 과정조차 없이, 그냥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비관론의 모습으로든 전략적 과장어법의 모습으로든 ‘시대가 바뀌었고, 담론이 죽었다’는 말은 아무튼 그 모양만큼은 익숙하지만, 그 윤곽이 지금처럼 선명했던 적은 없었던 듯싶다.


그러나 무엇이, 어쩌다 어떻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그것이 도달할 영역이 어디일지, 가늠은 가능하지만 쉽지 않다. 이를테면 미술에서 동시대성이라는 주제는 이제 지나간 근과거의 큰 줄기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감각을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에게, 동시대성이라는 주제는 비판적 미술을 추동하는 동력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미적 경향을 진공 포장하는 장치로 작동할 뿐,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동시대성이라는 과거의 동력과 그것이 조직했던 지난 미술의 경향을 해부하고 박제하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가능하다면 그것은 갱신된 시대를 포착하고 해명해 새로운 종류의 공간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일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컨대 말은 쉽다는 것이다.


말은 항상 쉽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다. 그리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일은 딱 그만큼 함께 어렵다. 어려움을 딛고 말을 분사하기에 있어서, 청년이라는 디딤돌은 항상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청년이라는 세대 단위를 새로 개발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1983년생인 노정태는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에 관한 서평에서 88만원 세대가 스스로의 세대를 가시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거론한 적 있다. (직접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의 세대를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들은 매우 분열적이고 또 일회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호명을 받아내는 수많은 세대단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혹은 우리는, 비록 '수꼴'이나 '보수화된 청년층'으로 매도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노정태, 「20대는 확실히 ‘야권’ 찍는다? 확실히 아니다!」,『프레시안, 2013.07.12. (http://goo.gl/XtbC3j)

문제는 서평이 2013년에 쓰여졌으며 그것이 88만원 세대, 즉 2007년경의 20대들에 관한 논평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생겨난다. 2015년인 현재에조차 노정태가 거론했던 가시화의 과제는 아직 미해결인 듯 보인다. 그렇다면 막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해야 할 그 아랫세대의 일원들에게, 세대적 정체성을 개발하고 눈에 띄게끔 조직하는 일은 좀 더 요원할지언정 좀 더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구부려보자. 구 청년 세대와 신 청년 세대 모두에게 가시화라는 과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구/신 청년 세대가 그러므로 텅 비어있다는 지적은 사실과 다르다. 구/신 청년 세대는 우선 “분명하게 도드라지는 세대성이 없다는” (임근준, http://chungwoo.egloos.com/4063697) 특징을 가지며,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을 표출한다. 그 같은 특징이 돌출시킨 짧은 궤적을 미술 평론가 임근준은 “병신미”(http://chungwoo.egloos.com/4020805)라고 명명한 적 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 여기’의 상실과 동시대성의 붕괴라는 문제가 사회적 상황을 통과하며 어떤 종류의 새로운 인간형들을 조제해내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역사와 정치보다, 사회와 아무튼 그 어떤 586스러운 문제들보다 생존이라는 압박에 등을 떠밀린 새로운 세대의 일원들은, 스스로를 구성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대화했다. 가시화와 집단화가 불가능할 뿐, 이전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과제가 (미)해결되었다.


니꼴라 부리요는 <래디컨트>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 감각이 저물어버린 세상을 긍정하고 그 위에서 비평적 공간을 펼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의 진단에서, 21세기 초의 문화적 지형은 혼돈스럽고 잠정적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술가들은 그 위에서 “이상적인 항해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의 전략적인 낙관주의는 지금의 문화적 지형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아무래도 허언 이상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유목주의에 대한 언급과 같은 것마저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의 기획 자체, 혼돈스럽고 잠정적인 시대상을 긍정하고 몇몇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쥐여주는 구성만큼은 다시 만지고 구부려볼 법한 생각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구부림에서 혼란스러운 시대상은 곧 (미)해결된 구/신 청년 세대의 특징적인 세대성에, 유목주의 운운하는 몇 가지 긍정적 방향성들은 집단화와 세대화를 허락하지 않는 특정 청년층의 개인주의적 경향들로 투박하게 번역/대입될 수 있을 것이다.


세대성을 반영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미술가들의 등장은 곧, 그것이 무엇인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무언가의 범람을 부를 것이다. 깨어진 역사적 시선이 범람하든 여태껏 없었던 종류의 시각성이 범람하든, 개인의 수만큼 그것은 넘쳐흐르며 곧 과잉의 방법론으로 정리된다. 한가지 방향의 시선으로 전부를 살필 수 없는 이 같은 방법의 등장은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비평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벌어지게 될 지금 혹은 언젠가의 사건들은 기존의 방법론이 적극적으로 의심의 눈길을 던지고 거부했던 시공간적 정체성을 고수할 뿐 아니라,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언제나 비판받는 다원주의적 경향과 지금의 새로운 엉망진창 시공간이 구별되는 점은, 미술에서 다원주의가 역사적 정식들의 오해와 오인으로부터 출발선을 그렸다면 지금의 경향은 그러한 오해와 오인, 나아가 그 오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전부 벗어나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을 테다. 이 공간에서 혼란스럽게 된 역사의 무더기를 바라보며 개탄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 되고, 슬퍼한다면 당신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때 담론이 죽었다, 같은 말은 미술의 영역에서, 아무것도 참고하지 않아도 되는 혼돈의 카오스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90년대를 전후하여 시작된 담론적 장소성이라는 맥락, 미술이 담론의 일부가 되어 발화한다는 담론화의 경향이 가졌던 유효성이 소진되었으며, 우리를 이끌던 하나의 경향이 소진된 위에서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느냐,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떤 모양으로 동기화할 것이냐의 문제의식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한 시기를 통과하며 창작이라는 행위는 차용의 다른 말이 되었다. 작업은 후반 작업이 되고 형태는 상호 형태가 되는 변환이 발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삶과 일상은 미술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성의 붕괴 이후 통일된 일상이 사라지면서, 이 새로운 방법론 또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앞선 방법론을 지지해주었던 지금-여기의 소실 이후, 과거는 딱 그만큼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이제 남겨진 사람들은 과거를 주워 모아서 미래를 구성하고, 퍼석하게 부서진 현재가 그 사이에서 좌우 뜀뛰기를 한다. 그렇다는 것은 곧 과거를 다루는 방법이야말로 창작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배회하는 “병신미”의 주체들은 그 공허한 과장 어법을 이용, 이 새로운 시공간감각과 그것을 반영하는 창작의 새로운 방법을 보조한다. 그것은 물론, 앞서 썼듯 타임라인의 범람을 부를 것인데, 넘칠 그릇이 없으므로 범람 또한 무방하다. 어떤 사람들은 공허를 긍정하는 순간 우리가 알던 것이 종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말은 물론 안 좋은 것이다.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특히 그렇다. 그러나 한시적으로, 공허를 긍정할 수 있는 -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 시작되어버린 것 같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이것은 뜬금없는 질문이 아닌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보는 일은 주로 두 팔을 축 내려뜨린 4년제 대학 재학생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집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는데 미래도 없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좀비떼들의 공간에서 이 질문은 다른 모양새를 가진다. 왜냐하면, 좀비가 되어버린 이상 먹고 자고 미래를 그리고 가족을 이뤄서 부모님께 홍삼액을 선물하는 삶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좀비들의 이야기는 인간들의 이야기와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새로 쓰는 이런 방식은 당연히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경원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삶의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심지어 현재 진행 중인 미적 실천의 중요한 지렛대로 기능하고 있는 어떤 경향을 의도적으로 괄시하니만큼, 다른 경향을 만들고 모양내고 말이 되게 하는 결과 또한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소의 시대의 특수한 가난과 제도적 파산 상태가 미적 실천의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꼭 담론화라는 지난 시대의 여과 장치에 맞추어진 미술적 형태로 제시되어야만 할까?


물론 좀비떼들의 공간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긍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좀비적 공간을 대변하고 확장하는 실천이 현재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위의 짧은 메모가 과장된 낙관주의의 모양을 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낙관이 아닌, 한층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낙관론 - 좀비떼들의 공간을 파악하고 성찰하고 그에 맞는 발화 형식으로 발화함으로써, 결론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하는 비평적 과장이, (태도가 아니라) 방법론적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좋을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드러내기에는 추상적이지만, 그럼에도 현 상태를 긍정하고, 또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낙관적 상태를 가정하는 일은 구/신 청년 세대의 무기력증을 추상적 차원에서 해소시키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믿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