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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저기-거기-접때-나중에]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을 향한 에세이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1)을 향한 에세이


황재민

 

마포구에 위치한 예술 공간 취미가에서 4주간 진행된 <취미관>은 변칙적 성격을 갖는 전시장으로서 때에 따라 갤러리, 그리고 아트샵이라는 이중적 자세를 취하는 취미가의 운영을 압축/확장하여 제시한 행사/전시였다. 총 서른하나의 작가 및 단체가 참가한 이 전시는 머릿수로 보자면 대규모 기획전을 방불케 하였으나 디스플레이된 모양새는 그렇지 않았다. 보통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는 취미가의 2층은 큰 규모의 전시를 하기에 좁은 공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여한 작가들은 본인의 작업을 출품하기 위해 정해진 크기의 유리케이스를 배당 받았다. 작가들에게 주어진 공간은 해당 상자의 사이즈로 정해졌고, 작가들은 그곳을 꾸미고 활용하면 되었다. 이처럼 <취미관>이라는 정리 정돈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게 규모와 별로 관련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취미관>은 무언가를 전시하고 경험하도록 이끄는 일인 동시에, 대안적인 종류의 미술 생산과 소비를 위한 장소이자 무엇보다도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미가가 유리케이스를 활용한 데에는 비교적 협소한 공간에서 최대의 공간을 쓰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이것은 미술을 보다 쉽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행사고 유리케이스는 그런 상점의 느낌을 내기에 적격이다. 이 디스플레이는 하나의 비유를 끌어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 서브컬처 중고물품 상점인 만다라케와 아키하바라 일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렌탈케이스’“2)이다. 취미가가 취미관을 광고하기 위해 쓴 트윗을 직접 인용하자면,

 

중고 상품 유통이 주 업무인 만다라케는 시간을 관장하는 회사라는 목표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만다라케는 그 시간을 관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일본관에서는 오타쿠를 특정 인간 군상이 아닌 공간으로 정의하고, 도시와 오타쿠라는 공간의 변화를 함께 탐구했습니다. 아키바 거리의 렌탈케이스를 오타쿠의 방이 선택, 편집, 축소, 밀집, 전시된 풍경으로 설명했습니다.“3)

 

시간을 관리하는 중고상품 유통 전문회사로서 만다라케가 렌탈케이스를 활용하는 방법,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의 일본관에서 도시 공간과 오타쿠의 관계를 살피며 아키바 거리의 렌탈케이스를 차용해 쓴 것, 취미가는 이 두 사례를 끌어다 놓고 시간에 대한 해설을 정당화한다. 만다라케의 유리 혹은 아크릴 상자가 중고 상품의 적절한 배치와 관리를 위하여 시간을 진공 포장하듯,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일본관의 디스플레이 중 일부가 유리 케이스를 공간 경험의 집약으로서 사용하듯, <취미관>은 밖으로부터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자 안에 미적/일상적 물건을 배열한다는 주제가 물건을 관람하는 일 이상이 되도록 조율한다.

 

전시에 참여한 서른하나의 작가/단체 모두 유리 케이스를 각자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 목적은 작업의 부산물을 전시하는 경우, 도록 등 전시의 부산물을 전시하는 경우, 작업의 다른 차원으로서 굿즈를 유용하는 경우, 유리케이스를 전시장으로 삼는 경우,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 등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상자 안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부각되는 것은 파편으로서의 쓸모다. 서울의 미술이 빈곤과 기회를 미디엄으로 삼았을 때, 그 중 가장 주요한 방법은 시간을 덩어리째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작업의 부산물 혹은 파생물을 병렬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미디엄의 파편화, 비평적 시선을 회피하려는 노력으로 작용했다. 미술 공간으로서 취미가는, 폐허 위에 하나의 스킨을 덮어씌워 환경디자인4)이 되었던 서울의 젊은 미술 위에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자생하려는 시도이자 무화되고 있는 경험에 맞서 조각난 전시 환경을 재구축하고 친밀한 관객을 만드려는 비판적 시도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 그것은 유리 상자로 상징되듯, 지나간 시간의 보존이다.

 

유리 상자 안에서, 보다 활기찬 지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쇠하지 않은 동력으로서 어제를 담으려는 행위와 맞부딪친다. 그리고 이렇듯 모순적인 상황은 그 어제의 대표적 본보기로서 신생공간의 과거와 현재를 연상토록 만든다. 신생공간이 무언가 기반이 되기 전에 힘이 없어진 것은 그 이후가 적절하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어울려 더욱 뒷맛이 썼다. 신생공간의 시공간이 지나간 뒤엔 세대 차원의 이후도 없었을 뿐더러 해당 시공간의 주역들에게도 특별한 이후가 주어지지 않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서울 바벨> 이래 국공립기관에서도 별 일이 없었다. 그 이후엔 단지 몇몇 공간만이 문을 닫고 다른 일을 하러 갔고, 서울이 이전보다 좀 더 좁아졌을 뿐이다. 신생공간의 시기에 주요한 비판 중 하나였던 작업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 또한 단단한 줄기로 엮이지 못하고 흩어졌고, 그 결과 어딘가 애매한 시간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 때문에 취미가는 여전히 제도의 패러디5)처럼 보이고 그 점이 여전히 흥미롭게 또는 좋지 않게 여겨진다. <취미관>이라는 표현은 미술관의 특정 대척점을 자처하고, “취미가미술가개념의 어떤 파열을 자처한다. 이렇기에 위의 연결이 어느 정도 패러디로 작용하는 셈인데, 이 패러디엔 여전히 원본을 지시하거나 참조해 유의미한 맥락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없고, 이것은 분명 이상한 것인 동시에 - 지금의 맥락을 통해 따졌을 때 합리적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생긴 것만 반질하지 폐허 내지 나아가 유령6)인 미술관을 향해 맹공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 거의 없을뿐더러, 나쁜 경우 때리고 싫어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을 때 거울을 통하여 보이는 것 역시 폐허일 것이고, 그 때문에라도 거울은 없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취미관>에서 보이는 것은 순진하거나 들뜬 마음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려 깊은 성질의 무엇으로, 제스처로 치자면 어깨 으쓱 Shrug’ 정도로 보여도 여전히 표정은 진지한 것이다. 그래서 <취미관>에서 엿볼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무엇인데, 폐허로서의 폐허와 유령으로서의 제도가 개념적 차원에서조차 더 멀어지기 전에, 차라리 폐허가 제도로 뛰어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우여곡절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이미 확정된 구획을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 막상 이 곳은 너무나도 근육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소위 신생공간, 혹은 개 중 몇몇 공간의 이상과 기성 제도의 이상은 다양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드문드문한 접점을 몇 남기고 서로 동떨어지게 되었으며, <취미관>은 결국 어떤 종류의 제도, 그러나 제도가 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특정한 에너지를 길어 올리기 위하여 행사 혹은 축제가 되어야 하는 상황을 실연한다. <취미관>의 참여 작가 목록은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인데, 홍승혜부터 우주 만물까지, 이제 그냥-모이는 것으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을 위하여 테두리는 넓고 커진다. 혹은 돌발적인 시간에게도 시간의 선형적 힘은 주어진다.

 

미술이 취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취미가 되고자 자처하는 미술의 사정은 별로 간단하지 않다. 허나 동시에, 이제 미술을 한다는 것이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울에서 살아남기정도로 보이더라도, 서울을 전시 경험에 비등하는 무엇으로 포섭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미술이 미적/일상적 경험의 한 축을 돌출시켜 취미가 된다 해도 오히려 취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 <취미관>이라는 광경은 서로 편안하고 사이좋게 보일까? 예쁘고 귀엽고 신경 쓰이는 것들로 가득 찬 유리 상자가 이른바 병신미의 수동-공격적인 성격과 얼마나 멀든 또 얼마나 가깝든, 취미가, 그리고 <취미관>취미라는 명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쓸모하고 무의미한 무엇의 미학화와 관련 있다. 좋게 보아 이것은 훌륭한 자산으로서의 평온함을 암시하지만 여기서 무엇이 나오게 될지는 결국 시간의 큰 힘에 의지하는 측면이 있어, 어딘가 보는 이를 꾸준히 불안하게끔 만드는 면 또한 있다. <취미관>에선 이런 상반된 감상이 계속해서 공존하고, 그것을 빌어 유리 상자에 가지런한 시공은 종합을 빗겨간다


1)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33468060692481

2)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24974079197184

3)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27247521931265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31380769546240

4) 윤원화, <환경 디자인 또는 신생공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 프레스, 157p.

5) "그래서 이들의 활동은 유령화된 제도의 불충분한 대체물로서 제도의 그림자처럼, 때로 심지어 패러디처럼 보인다.“ 윤원화, 위의 책, 158-9p.

6) 윤원화, 위의 책, 158-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