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의 바깥의 바깥의 바깥
황재민
* 이 글은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을 기획한 이양헌 기획자의 청탁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무대의 막이 걷힐 때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이 종료되면 막은 내려간다. 막이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막과 무대는 극 속 환상과 극 바깥 현실을 구분한다. 극장은 꽤 많은 규칙을 지닌 공간이지만, 기본적인 규칙 중 몇 가지를 꼽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1990년 카트린 메스너Kathrin Messner와 요세프 오트너Josef Ortner에 의하여 결성된 비엔나의 예술 단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 museum in progress’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 《방화막Safety Curtai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1] 제목이 암시하듯, 프로젝트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사용하여 임시적인 전시 공간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를 위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는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 다니엘 번바움Daniel Birnbaum, 낸시 스펙터Nancy Spector 등의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방화막을 장식할 예술가를 섭외하게끔 했다. 이들 큐레이터에 의해 섭외된 작가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하나의 이미지로 전유하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현재까지 카라 워커Kara Walker,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총 22명/팀의 예술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 편 2018년의 서울에서는 이양헌이 한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하 《Exhibition》)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획을 맡은 이양헌이 연구를 위하여 구축한 영상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권혁규, 박재용, 안대웅, 장진택, 조은비, 최정윤 등의 큐레이터를 섭외, 전시화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 총 48명/팀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그 물량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각 작가들이 제공한 영상을 단순 상영하기만 해도 약 1000여 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필요했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전시는 2018년 1월 경영난으로 인하여 폐관되었다가 4월 재개관한 오래된 소극장인 세실 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전시에 참여한 큐레이터들은 각자 하루의 시간을 배정 받아 전시 혹은 셋리스트 같은 것을 펼쳐낼 수 있었다.
《방화막》은 공연의 사이 시간에 개입하며 임시적 구조의 전시-시/공간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유연한 형태의 실천을 ‘전시’로 이름 짓고 정체화하는 것은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가 전개하는 활동의 주된 부분 중 하나인데, 이들은 신문, 뉴스, 잡지, 또 빌딩의 파사드나 TV, 인터넷 등의 공공적 미디어 공간을 활용하여 전시를 일상적 삶의 부분으로 겹쳐내고자 하고, 《방화막》 또한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2]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미술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한 이미지를 마주치게 되고, 해당 작품은 관객의 일상적 시간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한다. 반면 《Exhibition》은 극장의 외부에 머무르는 대신 극장의 내부로 개입한다. 전시에 입장한 관객은 객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스크린에는 준비된 영상이 영사된다. 《Exhibition》은 이처럼 극장의 안쪽으로 진입할 뿐 아니라 극장의 논리와 구조 또한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그 과정에서 극장의 문법 역시 최대한 모방된다. 이 같은 방법 탓에 《Exhibition》은 관습적 의미의 전시가 아니라, 말하자면 스크리닝이나 상영회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획자 이양헌은 이것을 전시로 적극 호명하고자 한다. 전시의 서문을 통해 밝힌 그의 의견에 따르면, 《Exhibition》이 굳이 전시로 불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전시와 비전시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미술관 안팎에서 수많은 전시가 생산되는 상황에서” “질문들의 연쇄를 소급할 전시의 특정성을 세우기 위해”서다. 가능한 전시의 영역을 찾기 위하여 세실극장은 “무대”가 되어 등장하고, 그 위에서 미술 작업work과 큐레이팅curating은 서로 교차하며 보다 자유롭게 수행된다.[3]
《방화막》과 《Exhibition》은 서로 무척 다른 환경과 상황에 기반한다. 《방화막》이 비엔나 오페라 극장이라는 큰 공간의 잉여적/부수적 부분을 경유해 스틸 이미지를 설치한다면, 《Exhibition》은 세실 극장이라는 보다 작은 공간의 중심에 자리잡아 무빙 이미지를 영사한다. 허나 이 두 사례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극장과 전시 간의 교차로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전시라는 개념을 재-정체화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두 전시는 모두 통상적인 전시의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장소의 완전한 변형을 꾀하되, 그것이 미술의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몇 가지 관습을 간직한다. 여기에는 전시와 관련된 몇몇 담론과 의제들이 겹쳐 보이는데, 이 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의견은 어쩌면 이제 전시가 어디에든 기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시가 어디에든 근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시가 화이트 큐브White Cube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쉽게 연결된다. 이런 생각엔 전시와 관련된 담론뿐 아니라, 미술 작업의 형태와 관련된 근거 역시 존재한다. 유명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1960년대 미술의 ‘확장된 장Expanded Field’ 아래서 작업하던 작가들은 변화한 작업의 개념과 그에 수반되는 형태를 제한하는 장소를 벗어나고자 미술을 위한 임의의 장소성을 새로 개척했고, 이 과정에서 화이트 큐브가 강제했던 물리적 형태가 주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미술이 보다 ‘급진화’되며 물리적 장소라는 주제를 개념적 장소로 대체했을 때, 미술제도의 여러 관습과 주변 요소들, 나아가 미술과 관계된 여러 담론과 문화적 틀 따위가 점차 하나의 매체로 특정되기 시작했다.[4] 이 흐름을 경유하여 전시 역시 하나의 매체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했고, 이런 맥락 안에서 박물관Museum과 공공 공간Public Space 등, 화이트 큐브 이외의 공간이 미술을 위해 가능한 장소로 점차 보편화됐다. 조형에 있어 조각이 ‘확장된 장’으로 전환되던 시점과 고전적 형태의 영화가 ‘확장된 영화Expanded Cinema’로 변환되는 시점 역시 여러 실천이 복잡하게 뒤얽히던 ‘확장’의 시기 안에서 서로 교차하는데, 확장된 조각이 ‘조각적인 것’을 해체/확장하는 과정에서 공간적 조건에 대해 자문했듯이, 확장된 영화 역시 ‘영화적인 것’의 이해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비평적 논의와 관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자연히 미술 갤러리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화이트 큐브와 극장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블랙 박스는 모종의 교차점을 형성하고, 《Exhibition》이 미술을 위한 장소로 극장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변환기의 서사와 맞물리며 당위성을 얻는다.[5]
나아가, 《Exhibition》은 극장과 무빙 이미지 아카이브를 “무대” 삼아 보다 진보한 형태의 큐레이팅과 전시를 유도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이상적 시도와는 별개로, 이런 종류의 활동은 이제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어쩌면 《Exhibition》이 비평하는 미술제도의 관습 중 가장 명시적 차원의 요소, 화이트 큐브-조건을 비평하기 위한 비非-화이트 큐브-조건을 형성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적 조건을 형성하는 일은 대개 화이트 큐브를 하나의 관습적인 상태로 상정하고, 그를 의식적으로 비평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이트 큐브가 파국을 맞은 이상 그 외부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않게 되었다. 전시는 이제 어디에나 있지만, 전시가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 역시 어디에나 있고, 화이트 큐브 바깥을 가리키려는 노력은 이제 그만큼 무의미하다. 이제 전시는 극장으로, 혹은 거리로, 또는 일시적 시공간으로 향하는 대신 근대적 조건을 혁신했던 현대적 미술의 공간-모델로서의 화이트 큐브를 새로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Exhibition》는 일단 전시의 형태를 취한 다음,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가 무엇으로 규정되는지, 큐레이팅은 어떻게 활성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실천이 수행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한지”, 적극적으로 묻고자 한다.[6] 기획자 이양헌이 설정한 이와 같은 질문에서, 전시라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큐레이터의 큐레이팅으로 파악된다. 허나 현재 새로운 종류의 전시는 어쩌면 큐레이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 작업을 통해, 그 내부로부터 실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의 동시대적Contemporary 조건이 붕괴한 이후의 상황에서 미술 작업은 다원화된 지지체Support를 통해 기존의 매체성을 갱신하고자 하고, 이 과정에서 전시, 또 화이트 큐브라는 특정한 요소는 이 지지체 내부로 종종 포섭된다. 전시는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을 위한 장소나 새로운 작업을 위한 토대가 아니기에, 작업은 전시를 제도의 한 가지 단위, 또 단순한 규칙으로 파악한 뒤 전시를 비평적으로 매개하는 방법을 발전시킨다. 이때 개별 작업은 무풍지대로 전락한 미술제도의 관습적 조건들을 상대할 수 밖에 없고, 작업이 이처럼 전시를 매개할 때 큐레이팅은 비로소 이제는 불가능해진 몇 가지의 조건들과 마주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전시’가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Exhibition》은 전시, 비전시nonexhibition, 또 반-전시anti-exhibition의 가능한 형태를 다각도로 중첩하여 “전시의 고유한 영토를 탐색”[7]하려 노력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미지의 영토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무언가의 파산이다. 《Exhibition》은 전시와 관련된 여러 겹의 고민을 노출하고, 전시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 이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낸다. 《Exhibition》은 아무래도 실패한 사례에 가깝지만, ‘유효한 전시는 어떤 방식과 형태로 가능할 것인가?’라는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이후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마칠 것이고, 그때 보게 되는 전시의 모습은 익숙하게 공유되는 전시의 모습과는 무척 다를 것이다.
[1] museum in progress, <Safety Curatain>, https://www.mip.at/projects/eiserner-vorhang
[5] Andrew V. Uroskie, 『Between the Black Box and the White Cube: Expanded Cinema and Postwar Ar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11p.